나의 시선을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
나는 식물계의 저승사자다. 우리 집 식물에게 의식과 감정이 있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아마도 옆 자리 화분의 동료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벌벌 떨었을지 모른다. 내 손은 똥손 중에 똥손이라, 키우기 쉽다는 스투키도 내 손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바짝 마르거나 과습으로 무른 상태가 되고 만다. 처음에야 하하 나는 역시 식물하고 안 맞아, 하고 웃어넘기지만, 죽어가는 식물을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면 점점 물 하나 적당히 주지 못하는 무딘 감각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 때로는 적반하장으로 왜 이리 나약한 녀석들이 우리 집으로 왔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식물이라 해도, 죽은 녀석을 뽑아서 정리하는 일은 무덤덤해지기 어려웠다. 화분에서 생명력을 잃은 녀석을 치울 때마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어떤 미안함과 무능함을 자책하는 마음이 쌓여갔다.
미안함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가슴이 뜨끔해지는 어떤 글을 읽었을 때였다. 부끄럽지 않은 식집사로 성장하고픈 마음으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어느 전문가가 식물을 잘 키우려면 햇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었다. 이 당연한 글을 읽고 시선을 내 방의 여러 다육이에게 돌렸다. 책상 위, 책꽂이 사이, 수납장 위. 나의 식물들은 밋밋해 보이는 자리에 푸릇한 색을 채워주고 있었다. 모두 빛과 바람은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식물은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역사 속 많은 철학자가 말했듯, 우리의 세계는 주관 혹은 표상이다. 나의 관점이 세계와 충돌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식물을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인테리어 소품으로 보는 관점은, 식물의 생명력을 앗아간다. 결국 우리 집 식물을 죽인 것은 나의 관점이었다. 어디 식물만 그럴까.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관계의 성질을 결정한다. 부모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으면, 자녀는 자립할 힘을 키우기 어려워진다. 강아지를 고양이로 보면 강아지는 외로움에 시름시름 앓아간다. 물을 많이 먹는 몬스테라를 선인장과 같이 보는 관점은, 몬스테라를 말라죽게 만든다.
결혼 전에 아내가 편지를 써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매일 글 쓰면서 어떻게 나한테 편지 한 장을 못 써주냐며, 엎드려 절 받기더라도 나의 손 편지가 받아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게 편지랑 그 글이랑 좀 다른데. 하고 우물쭈물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어영부영 넘어가기엔 너무 결연한 눈빛이었다. 아내가 편지 받아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편지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기든 소설이든 편지든, 글은 절대 작가를 비껴가지 않는 법이고,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 때면, 미안하다는 문장을 피해 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했을까. 개인적으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까지 수년간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오랫동안 방치하다시피 했다. 아내를 아끼는 친구와 선배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고울 리 없었다. 회식이 끝나고 남자친구는 데리러 오지 않느냐는 동료의 말에, 남자친구가 바빠서라며 둘러대기를 몇 년간 반복하니, 아내는 연애를 하기는 하는 거냐는 걱정을 사곤 했다. 오히려 혼자였다면 외롭지 않았을 것을, 남자친구가 있는 바람에 더 외로워지는 모순된 상황을 겪어야 했다.
돌아보면 아내에게 느끼는 미안함의 실체 역시, 나의 관점이 뿌리였다. 그때 나는 아내와 나의 관계를 선인장으로 보았다. 가끔씩 물을 주어도 잘 자란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내는 사실 고양잇과가 아니라 강아지과였으며, 선인장이 아니라 몬스테라였다는 것을. 그 긴 시간은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저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흘렀고, 나이도 먹은 나는 이제 식물을 잘 키우고 있을까. 꽤 여러 화분을 돌보고 있고, 어떤 녀석은 계속해서 증식을 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 손에 살아남은 녀석들은 어디 내놔도 살아남을 만한 녀석들이 아닐까. 오히려 내가 키웠기 때문에 저만큼 밖에 못 큰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의 관계가 그렇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