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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Aug 19. 2023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가(1)

글을 쓴다는 건, 변하고 싶다는 것.

거울로 보는 내 얼굴에는 평소 나의 표정이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의식하고 안면 근육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그나마 거울로 보기라도 하지. 걷는 자세와 식사를 하는 모습은 직접 보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니 실제 나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걷고, 말하고, 먹는 순간을 영상으로 찍어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결혼식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결혼식이 끝났을 때, 신혼집으로 돌아와 한숨 돌리면서 휴대폰을 열었다. 감사하게도 여러 사람이 축하 메시지와 함께 각자 자신이 휴대폰으로 찍은 결혼식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답장을 남겨놓고, 아내와 함께 몇 시간 전의 결혼식 순간을 복기했다.


어라. 나 표정이 왜 저래? 내가 진짜 저렇게 웃어? 내가 저렇게 걸었다고?


식장 앞에서 하객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대화하는 내 표정은 거울로 보던 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평소 이야기 해주었던 내 특유의 표정이 저거였나 싶었다. 말하는 중간중간 입모양을 뽀뽀하듯 작고 동그랗게 오므리고, 할 말을 생각할 땐 눈동자를 위로 올려 흰자를 노출시켰다. 아내가 진작 말해주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는데, 직접 보니 평생 저러고 살았을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웃는 표정은 더 어색해서 울상을 삼십 퍼센트 정도 섞은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랑 입장 장면에선 약간의 거북목을 한 채로 뚝딱 거리는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생각했다. 다시 결혼식 영상을 꺼내 볼 일은 없겠구나.


어느 날 컴퓨터의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깊숙하게 숨겨놓은 결혼식 사진과 영상을 발견했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당일의 다짐은 잊었는지, 내용물을 알고 있었지만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열어 보았다. 역시나 여전히 보기 안 좋은 표정과 꾸부정한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나지. 뭐 어때.


시간에 풍화되어 무뎌진 것일까.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화면 속 나를 측은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으로 내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대화하는 중간중간 습관처럼 눈알을 뒤집는 건 그래도 좀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문득 글쓰기도 더 꾸준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혼식 영상을 보다가 갑작스레 글쓰기가 떠오른  자주  자신을 안팎으로 마주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자기를 마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사진과 영상이 자신의 겉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글쓰기는 실체가 흐릿한 자기 내면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마주할  있게 해 준다. 글쓰기는 우리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글쓰기가 우리를 살린다.

 

서른 살의 어느 날 밤에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히 노트를 펴고 펜을 쥐었다. 약간은 본능에 가까웠다. 살고자 하는 본능. 그날 밤은 귀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차도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날이었다. 달리는 차의 굉음을 듣는 순간, 가슴속 밑바닥에서 울컥하고 차오르는 분노가 나를 향하는 듯한 느낌. 아무래도 내 안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왜 글쓰기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일단 다 꺼내놓고 실체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나만 읽을 수 있을 법한 글을 써 내려갔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억과 따라오는 감정을 몇 개의 단어와 문장으로 압축해서 두서없이 나열했다. 욕설과 분노,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 용기와 비겁함, 그리고 불현듯 생각나는 이의 이름. 더 떠오르는 게 없을 때까지 몇 페이지에 걸쳐 적었다. 그리고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나의 눈에 걸리는 단어와 문장에 펜으로 표시를 했다. 잠시 덮어두고 다시 펼쳐보기를 반복하다 보니, 나의 글을 관통하는 말이 떠올랐다. 자격지심과 자기 연민. 그렇게 처음 글쓰기로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경험을 했다. 마치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세상을 힘들게 살아간다. 시야가 굉장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좁은 시야에 보이는  오로지 나의 아픔뿐이니까. 부끄럽게도 이십 대에는 나만 힘든 줄 알았다. 이렇게 힘든 마음은 나만의 것이라고.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고, 이런 공허함과 아픔은 나만 겪는다고. 너희들이 뭘 알아. 뭐 이런 마음이었달까. 자의식 과잉의 지난날을 거친 문장으로 마주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런 남루한 정신으로 젊은 날을 살아왔구나. 내 안의 충동과 싸울 때마다 펜을 들고 노트에 글을 쏟아내며 마주한 내 모습이었다.  






나를 알고 싶으면나로부터 빠져나와서 나를 보아야 한다그래야 내가 보인다글쓰기는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부터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니까.


혼란스러운 내면의 이야기에 활자라는 실체를 부여해서 바깥으로 꺼내 놓으면, 마치 제삼자의 시선으로 남의 이야기를 읽듯 나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다. 나의 아픔이 남의 이야기처럼 다가올 때,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보기 수월해진다. 옆에서 훈수를 둘 때 상황이 더 잘 보이는 법 아닌가.


글을 쓴다는 건 변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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