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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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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Nov 12. 2023

당신은 내게 영원히 스물 한 살이야.

주름을 펼칠 수 있는 남편이 될 수 있기를.

다급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가보니 아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오빠. 이거 봐봐. 내 눈 앞에 가까이 다가온 아내의 손가락엔 머리카락 한 올이 살포시 쥐어져 있었다. 새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삼십 대 중반에 접어들어 처음 흰 머리를 보았다면 모발 상태가 아직 젊다는 것 아닐까 싶었지만, 당사자의 표정을 보니 괜찮다는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가 더 심각해'를 시전하며 안심시키기로 했다.


내 얼굴을 봐. 지금 내 앞에서 새치 하나 가지고 놀라기야? 


나는 앞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바짝 까고 희번뜩한 눈으로 얼굴에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는 게 이런거구나를 직접 보여주었다. 매일 봐서 새삼스럽지만, 적나라한 남편의 얼굴에 놀란 아내는 경악을 하며 차마 자신의 새치 한 올을 계속 이야기할 수 없었다.






사실 급격한 노화를 걱정해야 하는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시기에 노화의 특이점이 온다는데, 내 유전자에는 서른아홉 해쯤 살았을 때 늙음의 가속 페달을 한 번 끝까지 밟으라는 명령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다. 마흔을 앞둔 2년 동안 얼굴 이곳저곳엔 주름이 잡히고, 살은 찌고, 눈꺼풀이 쳐지면서 없던 쌍꺼풀도 생기고, 흰머리는 늘고, 헤어라인은 세월에 겁을 먹은 듯 전선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관리를 안 한 탓이라고 말하지만, 반만 동의한다. 노화는 늦출 수 있어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기가 다를 뿐 예정된 미래다. 그리고 운명은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믿는다.


스스로 자 自 , 그러할 연 然.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 자연이란 말을 무척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게 훨씬 아름답다고 여겼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찬 바람이 불고 새해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밀려오는 건, 우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병원 방문이 잦아지신 부모님, 이별이 시간을 준비하는 친척 어른들, 하루가 다르게 활동량이 떨어지는 열두 살 고양이. 그리고 우리 얼굴에도 한 줄씩 드리우는 주름.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십 년 만이었다. 친구가 이민을 가는 바람에 통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보자마자 우리는 감탄을 하며, "이야. 그대로네."라는 인삿말을 서로에게 건넸다. 물론 우리는 안다. 십 년 사이에 상실한 피부 탄력과 늘어난 주름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대로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은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나는 친구의 주름이 없던 시절을 기억한다. 얼굴에 작은 흉터가 고등학교 시절에 생겼다는 것도, 눈가의 주름이 언제 쯤부터 고민이었는지도 알고 있다. 무수한 변화 속에도 그 옛날의 친구를 기억한다. 오래된 친구는 그래서 고마운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여러 철학적 내용을 주름이란 이미지에 담아내려고 했다 사람의 기억과 정체성도 마찬가지다밖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주름 속에는  사람의 살아낸 영혼이 담긴 것이나 다름없다우리의 주름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그것은 존재하지 않던 시절도 있으며누군가는 펼쳐보일 수도 있다오래된 관계가 소중한 것은 서로의 주름을 펼쳐서 그 사이에 담긴 이야기를 읽을 수도, 팽팽해진 서로의 모습을 기억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주름을 가장 잘 이해해줄 이는 누구인가.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영원히 스물 한 살이야.




(……그러니까 나도 스물 여섯으로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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