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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Jan 14. 2024

나랑 스키장 갈래?

오빠다움의 추억

가수 김태우의 노래 '사랑비'가 사랑받던 2009년 겨울, 나는 같은 과 1학년 여자 후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큰 키에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는 습관이 있던 그 아이를 흘깃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는 일이 점점 늘어났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막무가내로 들이댔다간 마음의 상처를 잔뜩 입은 패잔병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우연히 학과 사무실에서 둘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겼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는 제법 깊은 이야기로 이어졌고, 나는 이 아이가 남동생 둘이 있는 세 남매의 장녀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힌트였다. 장남인 나 역시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랐으니, 이 친구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해 본 것이다. 어른스러운 오빠로 다가가면 승산이 있으리라. 스물여섯과 스물 하나. 나이차도 다섯 살이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이십 대 초반에 다섯 살 차이는 꽤 크니까. 그때부터 시험 기간의 간식처럼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며, 우리는 제법 편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기말고사를 마친 날 우리는 방학 계획을 이야기했다. 나는 보드를 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여자 후배는 한 번도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 이거야. 안 해본 것을 가르쳐주는 그림은 제법 어른스럽다고 스물여섯의 나는 생각했다. 당시 나는 남양주에 살았고, 그 아이는 서울 동북부에 살아서 거리도 멀지 않았다. 우리 집 가까이에 스키장이 있어. 하루만 배워도 어찌어찌 내려오는 정도는 될 거야. 당일로 갈 수 있는 거리니까 같이 가자. 내가 가르쳐 줄게.  


당일을 강조하면 속이 시커먼 남자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후배는 놀란 눈으로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망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글로 적고 보니 더욱) 너무 투명해서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이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보드를 타러 스키장에 갔고 이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진실은 나도 작년에  하루 친구에게 배운  전부였다 


둘 다 리프트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초보자 연습 장소에서 중심도 못 잡고 뒹구르며 이 어이없는 상황을 재밌다고 깔깔 댔다. 우리는 이것도 추억이라고, 뒹굴었던 눈밭 위에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우리가 연인이 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이었다. 


예상했다시피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지금은 부부가 되어 함께 살고 있다. 






그 시절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내가 왜 오빠랑 스키장을 가죠? (십사 년을 함께 해보니, 이 반응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만약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우선 학과 생활은 망했다. 이미 예비역이라 군대로 도망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꽤 오랫동안 앓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했을 테다. 그러니까 당시 나는 나의 세계를 모두 걸고 뛰어들 만큼,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나는 스물여섯의 열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추억을 곱씹으며 처음의 감정을 돌아보고 음미하는 일은 소중한데, 추억은 사실 지금의 나를 마주하고 그때의 나를 재해석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흔 넘어 다시 마주한 스물여섯의 이야기에서, 처음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열정이 잔잔한 안정으로 바뀌었고 우리의 낭만도 일상에 잠식되었다고 이해했다. 현재는 상실한 감정을 아쉽지만 그저 떠나보내야 하는 과거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투박했던 스물여섯의 열정을 마흔의 안정으로 품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정의 일상을 유지해 가는 데에는 분명 상당한 의지와 열정이 필요하다. 배우자를 쉬게 하려고 집안일을 먼저 해두는 것처럼, 비록 그것이 소박하고 안정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더라도 말이다. 


열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안정 속에 스며든 것이 아닐까.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며 성장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도 꿈에 등장한 보물을 찾아 스페인에서 이집트 피라미드로 먼 길을 떠난다. 성장하는 주인공이 그렇듯 목표했던 보물은 찾지 못한다. 대신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깨달으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처음으로 돌아왔지만 출발할 때와 다른 존재가 된 산티아고는 결국 고향의 교회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마치 우리가 처음을 추억하며 과거와 지금을 달리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으리니 모든 탐험의 끝은 시작하였던 곳에 
도착하여 비로소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되는 것이리라. 

T.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  



스키장에 갔던 그날, 초보자 연습 장소가 지루해진 나는 호기롭게 우리도 리프트를 한 번은 타고 가야지 않겠느냐며 그녀를 리프트로 이끌었다. 엉거주춤하게 간신히 앉은 리프트는 제법 높이 올라갔다. 어느 지점에선 슬로프와 멀어졌는데, 고요하게 숲 위를 산책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코 끝은 시리고, 칼바람은 볼을 할퀴었고, 묵직한 부츠를 신은 발은 허공에 둥실거리고 있을 때, 스키장에선 반복해서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 사랑이 머리에 내리면 추억이 되살아나고

가슴에 내리면 소중했던 사랑이 떠오르고 

<사랑비> 2009

작사 노래 김태우, 작곡 편곡 이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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