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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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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Mar 10. 2024

내가 봤어. 당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부부가 서로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

서른 다섯 즈음에는 막연한 마음을 품었다. 혼자 운영하는 출판사를 해보고 싶다는 꿈. 무언가를 열망하면 상상도 해보기 마련이라, 흐릿하게나마 출판사의 방향을 그려보곤 했다. 생각은 늘 비슷하게 흘렀다. 출판으로 돈을 벌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다른 소소한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얼마간은 책 만드는 데 투자하면 어찌어찌 되지 않을까. 딱 이 정도의 팔자 좋은 공상 아니 망상을 하다보면 다시 현실을 자각했다. 정신차려. 여자친구랑 결혼 하려면 돈만 보고 일 해야지, 어디 자아실현이란 철 없는 생각을 하고 있어. 시간은 흘러 내 나이는 마흔을 넘겼다. 그 사이 여자친구는 아내가 되었고, 남편이자 가장이면서 아빠가 되고 싶은 나는 더욱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은 늘고 체력도 떨어졌지만, 경험을 좀 더 쌓았던 것은 삶의 태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경험해봤기에 아는 것이다. 조금씩 고장나는 몸으로 저 일을 해낼 수 없다는 서글픈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의심하는 날도 많아졌다. 책임질 삶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운신의 폭 마저 확연하게 줄었으니, 도전이란 단어는 점점 더 멀어졌다. 물론 내 능력을 무작정 긍정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자기 객관화가 조금 더 잘 된다고 좋게 해석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뭐를 잘 모를 때 용기 내기도 쉽지 않은가. 진짜 용기는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뒤 지금 얼마나 어려운 과제를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깨닫고도 발걸음을 내딛는 데 있다. 결국 나부터도 출판사를 해보고 싶다는 꿈은 헛바람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일이 벌써 몇 년 전이라니, 하며 놀라움을 주는 추억들이 쏟아졌다. 대화는 아내가 이십 대에 취업했던 시절까지 돌아갔다.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지만, 회사에서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던 아내는 진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찾은 것이 베이킹. 홈베이킹은 오랫동안 해왔지만, 그렇다고 업으로 삼는다는 결심이 쉬울리 없지 않은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조건 바로 시작하라며 부채질을 했다. 오히려 이럴 땐 더 극적으로 허세를 부리며 상대의 마음을 지지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돈 걱정은 하지마. 내가 다 책임질게. 아내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도 고마워했다. 쥐뿔도 없는 거 빤히 알고 있었는데,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든든해서 결심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과거에서 미래로 바뀌었다.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이제라도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말을 빙빙 돌리고 자꾸만 멈칫거리며 아내에게 속마음을 꺼냈다.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글 다루는 일을 해보고 싶어. 여기서 더 나이를 먹으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이 생기기 전에 한 번은 도전해보고 싶어. 내 말에 아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뒤에서 도와줄테니 당장 해보라고 했다. 그 순간 우리가 스물 여섯, 스물 하나였을 때 만난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상대의 젊은 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둘이 성장하는 과정을 서로 지켜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고민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를 얼마나 힘들게 책임지고 살아왔는지, 이십 대와 삼십 대 내내 겪은 성장통을 모두 지켜봤고 앞으로도 지켜봐주겠다는 관계가 가장 가까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마흔을 지나서 마음에 품고만 있던 일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는 않는다. 역시나 헛바람이었을 뿐이었음을 확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보려고 한다. 지켜봐주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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