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사이다. 그는 십 대 사춘기. 나는 오십 대 갱년기니까.
날이 갈수록 세대와 거대한 시간의 차이가 느껴지는 모자사이.
그래도 누나들보다 더 뜨겁게 엄마를 끌어안아주니 내 용서해 주마.
가끔은 싸가지가 바가지임을 드러내듯이 즈이 부모에게 틀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 틀딱이라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뭐라 말하겠니?
그러니까 예전 풋풋하게 젊은 엄마였을 때 나는 우리 딸들에게 어떤 엄마였나.
생각해 보니 별 거 없었다.
다 차치하고 내가 너희들을 돌볼 때 무슨 마음이었으며 어떤 세계관으로 키웠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사실 엄마로 살아내기도 바빴으니까.
그러니 늦둥이 아들에게 엄마는 이런 세계관을 갖고 너를 키우는 거니까 힘들겠지만 잘 따라와 주렴 한다고 해도 서로 알아듣는 포인트가 달라서 역부족이다.
우주와 땅만큼 깊고 먼 너와의 거리가 언제나 나는 막막하다.
그러다가도 이게 맞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넌 내가 아니고 난 네가 아니니까 우린 맞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또 어느 때 네가 퍽 외로워 보이면 엄마는 가슴이 쿵 떨어진다.
그런 슬픔이 무거울 때면 엄마 특유의 개그감으로 나와 너를 달래기도 하고.
그래, 우리가 너를 좀 늦게 낳았기로소니 그게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이냐? 이놈아!!
그래서 이제부턴 생색이라도 낼까 한다.
청소년 냄새 폴폴 나는 꿉꿉한 이부자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빨아서 건조해 향내 가득 채워서 깔아주며 아이고, 이런 엄마가 어딨냐?(사실 이런 엄마는 쌔고쌨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밝혀질 테지만 그때까진 대단한 엄마임을 그에게 팍팍 드러내기로 한다)
그러면 아들도 그러게, 엄마 밖에 없어. 하고 맞장구 하나 쳐주면 그만인 거다.
이제야 생색이란 게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토닥토닥해 주는 거라는 걸 알았다고 나 할까?
가족 중 생색을 무지무지 잘 챙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매 순간 생색을 내다가 자기의 푸릇한 진심까지도 묻혀버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95의 사랑과 배려를 하였지만 '생색'이라는 그물에 걸려 실상은 20도 건지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척 외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인생에서 생색은 퇴출시키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색도 못 내고 살아보니 그렇게 빡빡할 것까지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존중하려면 내면의 나에게 생색내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애쓰고 있다고.
그걸 알아주면 고맙겠지만 몰라주고 오해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정 불편하면 얘기해서 풀면 된다고.
혹 풀리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생색내고 생색 내다보면 활기 있는 기색까지 띄어 좀 더 명랑한 자아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 많은 어머니들은 가족사랑을 몸으로만 하지 말고 말로도 하고 미소로도 하고 명랑함으로 바꿔서 자신에게 활기 있는 기색을 선사하면 좋겠다.
자신에게 꼭 맞게 세팅해서 사용하다가 공치사사태까지 나아간다면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