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 만한 이별

by 캐리소


열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주차장의 차들은 줄어들지 않는구나.

열차 시간에 늦을까 봐,

열차 타기 전까지 내 식사를 챙기지 못할까 봐, 마음이 바쁜 네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째 나는 매일 네가 새로울까.


이렇게 새롭게 닿는 마음이 너에게 좋은 걸까, 아닌 걸까?

예전의 너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세계였는데 지금은

조금 더 넓어진 우주 같다.

너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매번 새롭게 너를 알아가는 게 내겐 가시 같은 아픔이기도 해.

너를 나와 분리해야 네가 더 너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거니까.


지금은 새 옷과 신발이 적응이 안돼 엉거주춤하겠지만 나를 떠난 너는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거야.

언젠가는 조용히 너의 자리를 알고 딱 알맞게 들어앉겠지.






열차 시간에 맞추느라 서둘러 식사를 하고 무거운 캐리어 때문에 키작은 엄마가 내동댕이쳐질까 봐 염려하면서 너는 내 손에서 기어이 짐을 빼앗아 든다.

짐을 미는 너의 뒤에서 병아리가 된 것처럼 종종종 쫓아간다.

아잉, 좋다!

엉성하고 허당인 네가 나를 챙기는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나지만 닭 노릇 하는 네 자존심을 위해 내 미소는 지그시 눌러 놓는다.


열차에 몸을 싣고 너와 작별하는 시간.

매사에 조심하고(블라블라) 짐은 이렇게 이렇게 하고 몇 번째에서 내리라는 너의 말에 나는 나는 웃기지만 (효리처럼) 그냥 웃긴 건 아니다.

그래,

지금은 나보다 훨씬 커졌고 엄마의 살림을 흉내 내서 소꿉놀이 중인 꼬마아이가 아니어서

엄마 눈엔 네가 새롭다.

생명의 꿈틀거림은 경이이기도 하지만 어느 면으로는 귀엽고 웃기다.


날은 갑자기 추워지고 덩달아 너도 조금은 우울한 것 같다.

잔뜩 흐린 날씨가 괜히 우리의 작별에 먼저 설레발이다.

너의 집에 있던 며칠 전 네가 네 남편에게 했던 말이 내 속에서 돌닻이 된다.

'우리 엄마 곁에서 날 떼놓고 이 먼 곳에서 살게 하는 게 용서가 안된다'는 말.

그런 네가 이 배경에 더 우울해질까 봐 난 눈치를 본다.

내 가슴속 서랍에 가장 여리고 붉은 살갗인 너희들의 마음.

그 마음이 원망이나 고통이라면 난 어째야 하나.


고통과 시련, 두려움과 좌절감은 네게서 해야 할 역할이 있어서 온 것이라고 하지. 그걸 통해 근육을 만들고 그 근육으로 다음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래. 주 1)


엄마도 고통은 싫지만, 그게 나를 더 크게 만든다면 싫다고 피해가지는 않을 거야.

우리, 그러자.


지금의 너 자신을 현존재라고 한다면,

지금 너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 거야.

그 불안의 기분은 네가 그동안 견지해 온 삶의 확실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 기분을 받아들이는 순간 현존재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어. 주 2)

낯설고 섬뜩한 기분의 한가운데서 현존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주 3)


부디 그 불안이 옅어지기를.

너 자신으로 닻을 내려 그곳에서 안온하기를.


기어이 열차 안에 캐리어를 넣어주고 날 안는다. 원래는 데면데면했는데 -나만 그랬나?- 이별이란 숙제는 우리에게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게 하나보다. 고마워, 딸.

딸이라는 말이 이렇게 포도송이처럼 풍성하고 청량하게 들릴 줄이야.

난 또 딸바보 엄마가 되어 기뻐도 슬퍼도 잘 견뎌가며 너희들을 위해 기도의 촛불을 켤 거야. 나를 잘 돌보아 너희들의 안심을 짓고 너희들의 울타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거기 부산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고 주혁이가 말하더라.

할머니랑 같이 눈 보고 싶으니 지금 할머니네 동네에 내리고 있는 눈 사진 하나 보내달라고.

아직은 아기티가 벗어질랑말랑한 초딩 3학년의 그리움이 내겐 너의 그리움과 겹쳐져.

읽던 책 한 페이지를 넘기듯 철 모르는 병아리처럼 새로운 해와 또 만날 새로운 날들을 기다린다.


그때까지 행복해. 딸.

-----


주 1) 엄마의 유산. 김주원 지음.

주 2)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3)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함.




이 글은 2023년 9월에 작성한 글로 다시 재구성해서 올립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