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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순례자

by 캐리소

길을 가다가 대머리 할아버지를 보았다.

키는 170센티 전후로 보이고 나이는 70대 중반쯤인 듯했다.

움푹 파인 눈가가 좀 짓물러 있었고 눈빛은 형형했지만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다.
그는 그저 내게 낯선 노인이었다.


어떤 사람의 외모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눠본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눈으로 보는 건 그의 전체 모습 중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며 그것도 정신이나 영혼의 모습이 아닌 겉모습의 분위기나 그의 특징 정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아는 것- 혹자는 이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그 노인에게도 내게도 영혼이란 게 존재한다.


우리 각자가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으니 영혼에게도 영혼 특유의 생김새가 있지 않을까?

영혼의 생김새도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빛깔, 모양, 형식이 모두 다를 것이다.


이 생각이 들었던 밑바닥엔 내가 나를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와 정작 거울을 보고 내 모습을 확인할 때가 너무나 달라서 놀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그린 나는 동그란 얼굴에 조금은 어려 보이는 -예를 들면 삼십 대의 발랄한 이마에 광택이 있는-모습이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니 작고 기다란 얼굴을 한 50대 중년 아줌마가 녹진한 잡티가 내려앉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커다란 괴리인지!


한동안 충격을 받아 가만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누가 알까.

그럴 때 나는 뜨악!

내적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아주 낯설고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란 건 어디서 비롯된 결과물일까.

그건 나를 생각하는 관념 자체가 나의 겉모습이 아닌 영혼의 목소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 영혼은 나의 겉모습보다 더 투명한지도 모르겠다.




두려워할 때마다 우리는 정녕 속은 것이다. 그리고 너의 마음은 영혼을 섬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영혼에게 일용할 양식을 부정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
[기적수업. 헬렌 슈크만]

삶의 생채기 안에서 내 영혼은 영혼 특유의 낙천성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남루한 습관의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영혼과 육신의 심연의 거리가 더욱더 크게 벌어져서 나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이렇듯 머리 위에 떠오른 모습과 실제의 -사실 실제라는 건 없을 수도 있겠다. 내가 보는 모습도 거울을 통해 굴절되어 보이는 것이므로- 모습과의 괴리가 영혼의 모습에까지 미치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영혼과 실제 영혼의 모습이 내가 떠올렸던 나와 거울 속 나와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스쳐다.


그러나 책은 내게 가르친다.

영혼은 이미 완벽하며, 따라서 교정이 필요없다.

오로지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이제 볼펜 몸통에 의지하던 몽당연필처럼 내 삶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중략)
어떤 것도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편지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 힘을 준 자국만 남을 것이다.
사라짐은 아름다운 일이다.

[미오기전. 김미옥. 이유출판]


살아가는 일과 삶이 끝난 후의 영원 속의 나는 영원한 뫼비우스의 띠 안의 아주 작은 지점과 지점의 연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몸은 언젠가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영혼이 할 일을 위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혼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영혼의 생김새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했을 테니까.

영혼이 내게 하는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겠지!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이곳에서 모두는 여행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작은 지구의 어느 한 지점, 인생이라는 길 위의 순례길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여행자의 필수 덕목에는 넓은 안목, 관용하는 행동, 모든 인연과의 부드러운 끝맺음이 있다.

이곳에서 이것들을 빚으며 살아가야 한다.



지난날 한때, 멈추고 짐을 부려 놓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지금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은 멈추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는 일도 포함된다.

순례길은 거칠다.

나 자신이 거친 길을 지을 때가 많기도 하니까.


그러나 자연은 우리의 길 위에 위로의 돌을 놓는다.

그에 의해 뿌려지는 씨앗의 향기가 따뜻하고 섬세한 언어로 날아간다.

내게 온 필명 '캐리소'처럼.

전파자의 길.


무엇을 전파할지는 나의 씨뿌림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순례자처럼 지난 날의 나에게 발을 걸고 넘어져 있지 않으며,

타인의 인정에 목매지 않고,

내게 주어진 신념대로 걷는다.
가끔은 실수와 판단오류를 피할 수 없더라도 낙담하지 않는다.

낙담했더라도 다시 간다.


저 멀리 오로라를 바라보며 걸어갈 때 내 영혼의 생김새가 완성될 것이다.
영혼의 모습은 어떤 정형화된 것으로 말할 수 없는 그윽함이 담겨 있다.


자신의 길에 순례의 이정표를 세워두면, 자신의 사상과 눈물과 기쁨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여행기이다.
- 아미엘의 인생일기


늘그래 작가님이 매일 읽는 책에서 데려온 문장이다.

순례의 이정표가 완전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 여행에서 진실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것,

그 아름다움의 주인이 인정하실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 기적수업. 헬렌 슈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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