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으며
도덕감정론은 함께 읽는 책이다.
혼자서는 읽어지지 않는 책이라서 그렇다.
애덤 스미스라는 이름은 예전 국사 시간이었는지 국어 시간에 '국부론'으로 언뜻 스친 이름이어서 낯이 익었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읽으면서도 아주 소소한 운명 같은 것을 감지하고 있다.
한주에 한번 정도 읽고 있는데 이 글을 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 책이 다분히 센세이션 했을 것 같다. 개인의 자기 이익 추구가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이는 당시의 전통적인 도덕관념과는 다른 시각으로, 개인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스마트한 브런치 이웃 작가님이 애덤 스미스를 언급하시며
'근대사상의 가장 혁신적인 이론가 중 한 명이라고 하시며 개인의 이익추구가 윤리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도덕감정론'에서 보여줬다'고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역시 대단한 양반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번역의 난해함으로 이해불가의 소용돌이를 헤맨다. 나머지 반은 살짝 알아먹을 때도 있지만 다분히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한국어로 읽고 있지만 번역이 필요할 정도다.
인간에 대한 어떤 경험이, 혹은 어떤 고찰이 이렇게 인간 심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했는지 궁금해질 따름이다.
'행위의 적정성'에서 색다른 미로처럼 헤매었고 지금은 '공로와 과실, 보상과 처벌의 대상'에 관해 한 장 한 장 진행하고 있다.
자혜(慈惠)는 비유하자면 건물을 지탱하는 기초가 아니라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이므로, 그 실천을 권고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을 강제할 필요는 결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정의(正義)는 모든 건물을 지탱하는 주요 기둥이다. *
정의를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즉, 약자를 보호하고 난폭한 사람을 억제하고 죄인을 벌주기 위해서 신은 인간에게 악행에는 합당한 벌이 따르는 것과 법을 위반할 때 받을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간사회에 파수꾼으로 심어 주었다고 한다. * (쉬운 말로 풀어 봄)
맞네. 맞아.
공동이익에 관해 고려해 보면 단순한 동정심이 야기한 인도적 충동- 죄를 지은 자가 광포함이 한풀 꺾일 때, 더 이상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때, 관대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 에서 인도적 명령으로 평형을 되찾는다.
그래서 범죄자를 동정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정심을 거둬들이며 인류에 대해 느끼는 확장된 동정심을 갖게 된다.
'확장된 동정심'이라는 용어가 생소했지만 합당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이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임을 알 때 적합성이 드러난다.
시계의 톱니바퀴들은 모두 그 제조 목적, 즉 시간의 지시를 위해 경탄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조정되어 있다. 모든 톱니바퀴들의 각종 다양한 운동들은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협동하여 효과를 내고 있다. 비록 그 운동들이 이 효과를 만들어 내려는 욕구나 의도를 가 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시간의 지시)을 더 잘 수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욕구 또는 인도를 시계의 톱니바퀴들에게 돌리지 않고 시계 제조업자에게 돌린다. 그리고 우리는 톱니바퀴들이 용수철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용수철이자 신이 만들어내는 효과(즉, 톱니바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톱니바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중략)그러나 비록 우리가 신체의 작용을 설명할 때에는 항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직접원인과 최종 목적을 반드시 구분할 수 있지만. 마음의 작용을 설명할 때에는 이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기가 대단히 쉽다. 천연의 원칙들이 우리로 하여금 세련되고 계몽된 이성이 우리에게 추천해 준 목적들을 추구하도록 인도될 때, 우리가 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감정과 행동들을, 마치 신체 기제의 운동을 직접원인으로 생각하듯이, 이성의 지시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신의 지혜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
무슨 말인지 언뜻 알아듣기가 어렵다. 한참을 읽고 읽고 또 읽으니 촛농으로 쓴 비밀문서처럼 조용히 내용을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으로 감각을 설명할 때 이성에만 기댄다면 완전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폐단이 생긴다. 감각이나 느낌을 무시하는 것은 신의 지혜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격이다.
그래서 나의 판단을 의심해야 한다. 오히려 영혼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곧 위대한 최종목적을 위한 것이다.
많은 철학서를 접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읽은 내용으로 보건대 한결같이 이성만을 추구하지 말아라, 감각을 믿어라. 영혼의 소리를 들어라,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하나씩 생활에 적용해 가며 인식에 갇힌 생각패턴도 서서히 바꿔가는 중이다.
원리를 먼저 아는 것.
현상을 해석하는 힘을 기르는 것.
읽은 책을 삶에 녹여내어 살아보는 것.
범죄행위를 내다 버려라.
그 처벌이 그의 생애 중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후에까지 쫓아가서 응보 하게 되리라.
오늘도 뜨겁게 읽었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