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우정에 대하여

by 캐리소

며칠 전 성경을 읽다가 레이더에 걸리는 문장이 있었다.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욥 18 : 13)

고난을 당하고 있는 친구 욥을 찾아간 발닷은 그에게 쓴소리를 한다. 발닷은 욥의 환란의 원인을 욥의 자녀에 대한 죄로 판단하고 고난이 반드시 죄의 결과라는 인과관계적 신앙관을 들먹이며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다.

이 비유는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는 것처럼 고난이 욥의 가족과 주변을 공격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에 과연 무엇이 실려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비유를 욥에게 대입하기보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지체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망의 장자를 나야말로 알아볼 수 있는가.

우정의 일차적인 봉사는 잘못을 나무라고 바로잡는 일*이라고 하지만 발닷이 과연 욥과 신의 관계를 관조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우정이 바른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몽테뉴의 문장을 가져와본다.


우정은 전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러면서도 절제 있고 고른 열이고, 견고하고도 침착한 열이며, 거기에는 거칠고 찌르는 것이 없이 아주 보드랍고 매끈한 심정이다.

-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우정은 잔잔한 물결이다.

시간과 경험이 쌓인 밑바닥을 품고 있으면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신경질조차도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여유를 물결의 흐름처럼 흘려보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시간이 일상 같아서 좋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각자의 삶을 여과 없이 민낯으로 드러내기도 했지만 상관없다.

상대를 인정하게 되기까지의 그동안의 과정이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안전장치가 된다.


우정에는 그 자체밖에는 아무런 흥정도 없다는데 난 우정도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왜 만나야 하는지 타당성을 찾고 거기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마도 지루함과 오래된 익숙함을 이기지 못하고 또 '의미지랄병'이 도졌던 것이리라.


몽테뉴가 영혼의 단짝인 에티엔 드 라 보에티 잃고는 반쪽으로 밖에 살아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에 비하면 나의 우정은 먼지깃털처럼 사소하고 가볍다.

친구들아 미안하다.

영혼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난 너희들에게 멀고 먼 이웃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했으니까.

친밀성과 친교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진심으로 언제까지나 너희들과 연대하고 싶지만 이렇게 사과하는 것으로밖에는 내 마음을 진중하게 전하지 못하는구나!

너희들이 나를 친구로 불러줘서 고마울 뿐이다.

그냥,

닥치고 나 자신으로 잘 살게.

그게 너희들을 위한 나의 진정한 사과가 될 것 같으니.


몽테뉴는 왜 그 친구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이라고밖에 대답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영혼의 교통이 그들을 잇고 있었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수년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발닷과 같은 논쟁을 일으키며 그들을 얼마나 질리게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자기기만을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기다려주고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주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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