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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발까마귀 Nov 06. 2021

단추로 끓인 수우프

어린 시절 사랑했던 동화와의 재회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상 이야기를 좋아했다. 낯선 향신료와 식재료가 상세하게 서술되는 책들은 모조리  취향이었다. <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프랑스 미식 편만 닳도록 읽을 정도였다. <작은 아씨들> 읽으며 라임 절임의 중독적인 맛을 상상했고, <대지> 펼칠 때마다 기름지고 달콤한 월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책들 중에서도 시초가  책이 있었으니, 바로 계몽사 디즈니 전집에 포함된 <단추로 끓인 수우프> 였다.


똑똑한 데이지는 단추 하나만으로 훌륭한 수프를 만들 수 있다고 구두쇠 스크루지를 속인다. 그리고는 "아, 이것만 넣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스크루지가 자꾸 재료를 넣게 만든다. 결국 한 솥 가득히 맛있는 수프가 만들어지고, 데이지는 이것을 이웃 모두와 나눈다. 어렸던 나에게 수프란 급식에 나오는 걸쭉한 옥수수맛 국물이었기에, 대체 왜 수프에 큼직한 뼈며 야채가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아마 제목이 '수프'가 아니라 '수우프'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옛 표기법에서는 어쩐지 고즈넉한 민가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직접 수프를 만들게  것은 자취 초기였다. 잔뜩 만들어서 얼려 두었다가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돌려 후루룩 먹고 나가기 좋아서였다. 처음 내가 만든 수프는 수프라기보다 차라리 라테에 가까웠다. 고구마와 우유만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러다가 양파를 갈색이  때까지 볶으면 풍미가 좋아진다는 팁을 얻었고, 오래도록 양파를 볶아 수프를 만들어 보았다. 과연, 생각지도 못한 섬세한 단맛이 났다. 흥미로웠다.

음, 나쁘지 않군.

하나의 단계에 익숙해진 나는 재미를 느꼈고,  풍부한 맛을 찾아 인터넷의 레시피들을 파고들었다. 이번엔 식용유가 아니라 버터를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렴한 버터인  알고 마가린을 사버린 사소한 실수와, 버터만 넣고 오랫동안 가열하는 바람에 냄비 바닥을 태워버린 작은 실패도 겪었다. 생크림을 넣자 호텔 조식 맛이 나서 충격을 받기도 했고, 우유와 생크림을 반반씩 넣어야 느끼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순후추 대신 통후추를 갈아 쓰니 훨씬 향이 좋다는 것도, 파슬리를 뿌리면 맛엔 변함이 없지만 조금  있어 보인다는 것도 깨달았다. 새로운 도전은 결과가 어떻든  신비롭고 놀라웠다. 어쨌든, 최악의 실패라봤자 약간 맛없는 수프를  혼자 먹어치워야 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수프가 꽤 그럴듯해졌을 무렵, 친척의 결혼식으로 부모님과 동생이 서울에 올라왔다. 바람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때였고, 새벽부터 좁은 자취방에 모인 가족들은 빈속이었다. 나는 막 끓인 고구마 수프를 한 국자씩 덜어주었다. 속이 불편하다며 사양하셨던 어머니는 몇 숟갈 뜨시더니 이내 빠르게 그릇을 비우셨다. 그러더니 내게 그릇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나, 한 그릇만 더 줄래?"


그 순간, 나는 왜 데이지가 정성껏 끓인 수프를 이웃들과 나눴는지 깨닫게 되었다. 맞닿은 손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온기는 내가 알지 못했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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