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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Mar 20. 2024

아무튼 서태지2-그가 이룬 것은...

아무튼 서태지-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_챕터 201 

서태지는 오래된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72년 생이다. 그것도 2월 21일 빠른 년생. 


그때는 어떤 때였나.

나는 70년 생으로서 조금은 서태지와 비슷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랐다고 자부해 왔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  때 아버지가 사준 8비트 컴을 만져보고 중학교 때 하늘벽이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확 문화적 환경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최병걸 1978)' '감수광 감수광 난 어찌 할렝 감수광(혜은이 1978)' 하는 노래를 들었던 것은 매한가지였을 거다.


90년대 이전에 음반은 굉장히 아마추어적으로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그리 설비가 좋지 않은 녹음실에서 쉽게 쉽게 이뤄졌다. 음반기획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어서 양희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가수들은 음반 제작자가 수익을 돈을 쓸어가고 자신은 노래에 대한 수익을 거의 얻지 못한 경우도 수두룩 하다고 했다. 그렇게 인기 많았던 김완선도, 지금도 전설인 조용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아마추어 음반 제작 환경은 정말 신기하게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뉜다. 아마도 이런 얘기를 들어본 사람은 많으리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권익을 끝까지 추구하고 지키려고 한 사람이 서태지라고.


이것은 내가 그를 찬양하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그랬다는 거다. 사실 그 전의 낭만적인 환경에서는 아무나 노래를 취입해도 되었고 작곡가에게 술 한 잔 사고 땡칠 때도 있었고 노래만 잘하면 누구나 유명한 해외 팝송의 번안곡을 불러서 앨범에 실을 수도 있었다. (트윈 폴리오의 그 수많은 아름다운 통기타 노래들을 들어보라. 거의 미국의 팝송을 그대로 번안한 노래들이다.) 가수는 돈 버는 직업도 존경받는 직업도 아니었다. 딴따라라는 멸칭으로 자주 불렸다.


그런데 서태지는 데뷔 후에 이런 음악환경에 창작자의 권리, 음악에 대한 권리, 초상권, 인격권 등 듣도 보도 못한 권리들을 추구하며 판을 뒤집어 버렸다. 곡을 먼저 남들이 마구 사용하게 하고 나중에 원곡자의 허락을 받는 일로 (컴백홈 이재수 사건) 촉발된 음악저작권 협회와의 오랜 싸움은 2010년도 후반에야 끝났을 정도로 세기에 걸친 싸움이었다. 그동안 서태지 노래는 노래방에서 부를 수 없는 노래로 유명했다. 온갖 종류의 법정 소송이 줄지어 서태지를 기다렸다.(말이 나왔으니 잠깐 해보자면 누가 서태지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른단 말인가. 그 세련된 악기연주와 구성은 노래방의 미디사운드로는 정말 별볼일 없이 들린다. 음악팬들로서는 반가운 경험이 아니다. 물론 아이들 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많은 40대 분들은 다른 의견일 것이다...)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대중음악의 봉건적인 수익구조를 무너뜨리고 계약과 권리를 확연히 챙기며 비로소 음반 업계에 새로운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방송국과의 기싸움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부르면 와야 하는 한없는 약자 가수와 그런 가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자 방송국 PD들. 92년 말, 서태지가 2집 앨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잠수해 버리자 방송국은 경악했고, 그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다며 서태지와 대립각을 세운 일은 유명하다.


1993년 2집 발표를 했을 때, 레게 머리를 하고 하여가를 부르며 컴백했을 당시 나는 신문 가판대를 메운, 컴백무대에 대한 악평으로 가득 찬 각종 스포츠 신문들, 그 뻘건 헤드라인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낯선 머리 스타일' '낯설고 짬뽕인 음악' '서태지와 아이들 감동 못 줘' 등등. (재밌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에 대해 1면에 헤드라인을 뽑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인기였다.)


자본주의의 기본은, 귀족 평민의 천부적인 신분이 아니라 개인 개인이 능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이었다. 17세기 돈을 벌러 세계 곳곳을 누빈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동인도 회사 등을 세우고 곳곳의 서양문명을 접하지 못했던 원주민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가치 있는 것을 교환하기 위해  인간으로 그들을 대했다.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본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배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가진 놀라운 근대성이다.


서태지는 부를 쌓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제대로 도입된 것이다. 개인의 권리 원작자의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하고, 앨범이 얼마나 나갔는지 비로소 제대로 집계가 되었고, (그러나 그 당시 무수히 팔려나간, 지금의 탑 100 차트인 길거리 리어카 테이프의 판매량은 알 길이 없다) 초상권을 도입해 법적으로 단속하여 함부로 사진 화보를 만들어 파는 해적질도 점점 정화되었다. 


팬으로서 서태지가 돈이 많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때가 꽤 있다. 수많았던, 악플 수준의 나쁜 기사가 날 때도,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도 그래도 태지씨 돈은 많겠지 하며 걱정을 던다. 아주 옛날, 그래봤자 2000년? 돈 없어서 나온다는 소리도 가끔 신문 지면을 장식했는데 팬들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서태지가 모든 걸 다한 것은 아니다. 90년대 들어 민주화 바람이 곳곳에 불었고 시민의식도 생기고 개인의 권리를 점점 더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사회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그저 새로운 세대에 속한 한 인기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천천히, 하지만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 이룬 것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근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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