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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Jan 23. 2020

외로움은 꼬리가 길다

언니는 안녕하시다 (2)

언니는 안녕하시다

(2) 외로움은 꼬리가 길다              





이십대의 나는 종종 연애했고 매번 실패했다. 심지어 내 연애의 기록은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신다거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서성인다거나 그의 SNS를 뒤져 일상을 캐본다거나 하는 일이 내겐 없었다. 나는 막연히 아쉬워했고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다 이내 잊어버렸다. 그 정도로 짧고 미숙한 연애였다.      


친구들은 내게 진득하게 사람을 좀 지켜보라고 충고했다.           


“연애는 결국 시간 쌓기야. 넌 어떻게 연애를 서점에서 책 고르듯 하냐? 책표지 맘에 들면 집어서 대충 훑어보고, 뒤에 추천사 읽고, 한두 페이지 살펴보다 아니다 싶음 탁 덮고.” 

“그게 뭐?”

“너가 그런다고. 스타일이 맘에 들면 주변 사람들 추천사부터 듣고. 한두 달 사귀다 냉큼 헤어지고. 너 그거 진짜 나쁜 버릇이야.”           


나는 내 연애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위치였으므로 그런가보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온전한 형태의 연애가 아니라 썸의 반복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나와 친밀하게 지내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를 비난했으므로 나는 반성하기로 했다. 아주 깊이.      



다음 사람과 연애를 할 때 나는 매일매일 이별을 보류했다. 그래, 연애는 시간 쌓기랬어. 우선 시간이 쌓여야 추억도 쌓이고 서로의 장점도 보이고 그러는 거지. 이 사람이 지금 좀 지겹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에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탓이야. 계속 만나다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오겠지. 이 사람을 소개해준 선배가 말하길, 매사 진지하고 우직한 성격의 사람이랬지. 그래서 이렇게 매사 빈틈이 없고 고지식하고, 아냐, 아냐. 내가 문과고 저 사람이 이과라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서인지도 몰라. 종종 대화가 끊기는 것도, 공통화제가 없는 것도, 그래도 이 영화를 고른 건 너무 최악 아닌가? 나는 그냥 별자리 얘기를 한 건데 왜 갑자기 행성과 항성과 위성의 차이점을 듣고 있어야 하지?           


내가 부정하고 방황하는 사이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한참만에야 그와 내가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불가능했던 연애를 어떻게든 이어보려 시간만 질질 끌었던 셈이다.           



        





타인의 연애는 늘 순조롭고 완벽해 보였다. 복학생 선배와 사귀게 된 동기가 냉면 계란 때문에 싸운 얘기를 들으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껴먹던 건데 오빠가 하필 계란 노른자만 쏙 빼가잖아. 그렇게 치사한 인간인지 미처 몰랐어. 투덜대면서도 동기는 ‘노른자만 쏙 빼간 치사한 오빠’가 냉면맛집에 그녀를 입성시키기 위해 두 시간 동안 줄을 섰단 얘기를 덧붙였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 부매니저를 좋아하게 된 또 다른 동기는 그녀에게 잘 보이겠단 일념으로 고객대응매뉴얼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시다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가 다정하게 통화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늘 홍조가 올라있었다. 그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반짝이고 설레어했고,     


그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웠다.           



“너는 그냥 외로운 거 아냐?”          



언니가 물었을 때 나는 곧장 부정했다. 아니오, 언니, 그런 게 아니라 연애하는 사람들이 부럽다니까요? 연애에너지가 반짝반짝하는 게 예뻐 죽겠다고요. 언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가 봐도 건성인 채였다.      


우리는 동아리실 회의테이블에 마주앉아 있었다. 회의테이블이라고 해도 거기서 정상적인 회의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떡볶이와 순대를 먹거나 컵라면을 먹으며 각자 과제를 하곤 했다. 학교 축제 즈음해서나 포스터와 프로그램북 만들기에 분주한 동아리라, 선후배 간의 서열도 당연히 느슨하고 여유로웠다.      


언니와 나는 떡볶이를 사러간 팀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던 참이었다. 금방 안 올 거야. 언니가 말했다.      


“저 둘, 요즘 수상하거든.”

“뭐예요, 둘이 연애해요? 연애하는구나! 어쩐지 저번에 집에 데려다주니 어쩌니 할 때부터 냄새가 나더라니. 노원구 사는 사람이 부천 사는 애를 왜 데려다주느냐고요.”

“냄새 맡은 거 치곤 깨닫는 게 늦네?”

“제가 의심은 많은데 눈치가 없거든요.”      


요즘 얼굴이 환해진 게 연애 때문이었구나. 부럽다. 좋겠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중얼거렸다. 언니는 떡볶이 팀이 놓고 간 담배를 만지작거리다 옆에 쓰인 경고 문구를 읽기 시작했다. 흡연은 피의 흐름을 줄여서……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피부 노화를 촉진시킬 수…… 읽고 있는 문구들이 생경해 쳐다보니 외국어가 빼곡히 쓰인 수입 담배였다. 언니는 영국에서 중, 고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한국으로 진학한, 어쩐지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였다. 언니가 현지에서 4년이나 사귀었다는(그러니까 현재로써 연애 7년차인) 남자친구도 영국에 있었다.           


“언니 남자친구는 잘 지낸대요? 아직 사귀죠?”

“잘 지내지. 잘 사귀고.”

“대단하다. 장거리연애라니 저는 상상도 안 가요. 아마 반 년도 못 버틸 걸요.”

“그건 네가 연애만 상상하니까 그렇고.”           


담배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언니가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말 그대로 연애생활이잖아. 외롭고 싶지 않으니까 하는 거. 매일 문자하고 전화하고 만나서 밥 먹고 시시콜콜 떠들고 서로 편들어주고 가끔 투닥거리고 미안해지면 이벤트도 하고 그러는 거.”

“그게 연애지 뭐예요?”


“절댓값이 달라. 내 경우는 ‘이든’하고만 연애하고 싶은 거. 네 경우는 누구하고든 ‘연애’만 하고 싶은 거.”           







떡볶이 팀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언니와 내 대화도 그 정도에서 끊겼기 때문에 나는 복잡한 마음에 휩싸였다. 언니는 나를 비난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 언니의 얼굴은 너무 자애롭고 무심했다. 친구들이 하듯 조급하게 나를 책망하거나 엄중한 조언을 덧댄 것도 아니었다. 나는 순대에서 골라먹던 돼지 귀와 허파를 남들이 다 찍어먹도록 모른 채 멍하니 떡을 씹었다. 앞에서는 떡볶이 팀이 서로에게 슬그머니(라고는 하지만 이제 보니 너무 노골적이라 보는 쪽이 더 민망할 정도로) 튀김과 음료를 밀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저런 게 연애 아닌가. 가까이에서 말과 경험을 나눌 수 없다면, 함께 쌓아갈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그런 연인이 무슨 소용이라는 거야.           


“외로움은 꼬리가 길어.”           



언니가 나를 향해 말했다. 떡볶이 팀이 쓰레기를 치운다는 이유로 떡볶이 포장물을 들고 함께 사라진(또!) 뒤였다.          



“네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해도 꼬리 때문에 방문이 자꾸 열리지. 그럼 들어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자꾸 그 문을 열고 들어오게 돼.”

“언니도 참, 전 외로운 게 아니라니까요.”

“너는 네가, 너의 의지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의 연애에서 네 문을 연 사람들이 네게 꼭 필요했던 사람들이야? 그 사람만이 열 수 있는 문이었어?”          


나는 항성과 위성, 행성에 대해 열을 올리며 설명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연애는 금방 끝나.
 외롭지 않은데도 꼭 해야만 하는 연애가 오래가는 거야.”         


      


때마침 돌아온 떡볶이 팀이 부산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부천까지 어림잡아 한 시간 반은 되는 거리였다. 부천에서 다시 노원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단지 집에 돌아가는 데만 세 시간이 걸리는데도 인천행 지하철에 함께 오르게 되는 이유라는 건 대체 뭘까.           


노원에서 부천은 너무 멀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그들은 그저 배시시 웃고 말 뿐이었는데, 그 얼굴이 그토록 빛이 나고 어여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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