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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딜레마

공익과 사익, 목적과 수단, 개인과 집단

by THE RISING SUN

딜레마가 클수록 가치가 크다. 의사는 냉철함을 유지하기 위해 수술의 대상을 인체가 아닌 물체로 봐야 하지만 동시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판사는 법의 엄정함을 유지하고 죄를 응징해야 하지만 동시에 양형이 불가능한 사실 뒤의 진실, 그리고 인간애를 잃지 않아야 정의에 이를 수 있다.


정치인도 수많은 딜레마 가운데 있다. 공익과 사익, 목적과 수단, 개인과 집단, 그 사이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길은 매우 좁고 울퉁불퉁하다. 수시로 전도(顚倒)되고 변질(變質)된다. 절대 넘어지면 안 된다. 의사가 넘어지면 수술에 실패하거나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판사가 넘어지면 오판을 하거나 억울함을 낳을 수 있다. 정치인이 넘어지면 어떻게 될까.


대통령의 딜레마는 가히 최고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 정의를 실현하는 판사의 딜레마를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고 했던 스탈린, “역사는 승리자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고 정의는 승자를 찬양하는 미사여구일 뿐이다.”라고 했던 히틀러를 기억하고자 함이다. 최고 지도자의 선택에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고, 세계의 평화가 달려있다. 국가의 정의, 세계의 정의가 그들에 의해 정의(定義)된다.


대통령의 권좌는 온 나라에 딱 하나뿐이다.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모든 정적들을 물리친 단 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최고의 권력의지를 가진 자여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에 필요한 권력을 얻으려는 의지를 권력의지라 한다면, 그건 동시에 권력욕도 될 수 있다. 지극히 사적인 욕망을 공적인 의지로 포장하고 속이는 일은 역사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을 대권(大權)이라 한다. 군주정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왕위(王位)에 빗대기도 한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힘을 손에 쥔 채로 사적 욕망과 공적 의지 사이에서 딜레마를 마주해야 하는 자리다. 사적 욕망은 내 안에 감출 수 있고, 공적 의지는 포장해 겉으로 드러낼 수 있다. 유혹은 강하고 달콤하다. 대통령의 첫 번째 딜레마다.


대통령은 외로운 자리라고 한다.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삶이 걸려있는 중대사들이 매일같이 쏟아진다. 참모들이 있고, 국무위원들이 있다.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있고, 정치적 조력을 제공할 국회의원들이 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오로지 대통령의 몫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강력한 자기확신과 결단력,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전 국가적, 전 국민적 반대, 심지어는 자신이 임명한 국무위원들과 참모들의 반대까지도 무릅쓰고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다. 최고 권력자의 독단적 결정은 모두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기도 하고, 반대로 밀어 넣어버리기도 한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1950)과 루스벨트의 뉴딜정책(1933)이 있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1812)과 스탈린의 집단농장정책(1928)이 있다.


그러나 또한 어느 누구보다 잘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국민의 외침을 듣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참모의 직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폴레옹이 참모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망자 최대 28만 명, 부상자 최대 15만 명, 탈영병 최대 13만 명, 포로 최대 10만 명에 달하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사전에 실패란 없다."는 화려한 승전의 기록들을 뒤로한 채 스스로 몰락을 길을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이 국민들의 외침을 들었다면 최대 350만 명을 아사시켜 인류사에 홀로도모르(Mass killing by hunger)라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전혀 상반되는 성질의 독선(獨善)과 들을 귀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대통령의 두 번째 딜레마다.


우리는 모름지기 지도자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똑하고 잘난’에 담긴 의도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에 부합하는 소양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학벌, 다양한 직업적 커리어, 저서나 인터뷰, 연설을 통해 드러나는 통찰력 등으로 우리는 그것을 평가한다.


언젠가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가 원로급 석학이 우리나라의 자녀교육에 대해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최근 사회 상류층, 지도층 인사들과 그 자녀들의 부도덕한, 아니 그걸 넘어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행태는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오냐오냐하며 귀하게 키운다. 잘 먹이고 잘 입힌다. 온갖 사교육을 총동원해서 명문대 보내고, 해외유학 보낸다. 높은 학력과 좋은 커리어를 가지고 귀국해서 교수가 되고, 대기업의 임원이 되고, 장관과 차관이 된다. 그러니 도무지 자신밖에 모르는,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삶이 힘들고 고단한 국민들의 감정과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그들의 언행에 대해 누구 탓을 하겠는가.”


대통령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는 어쩌면 똑똑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못한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아서만은 안 되고 경험하고 이해해야 한다. 가장 똑똑하지 않고 잘나지 못한 이부터 가장 똑똑하고 잘난 이까지, 모두가 국민이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를 챙겨야 한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국민들을 더 챙겨야 한다. 루스벨트는 “진보의 척도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보태주는가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제공하는가이다.”라고 했다. 높은 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낮은 곳을 알아야 한다. 부족함이 없으면서 동시에 부족함이 있는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 대통령의 세 번째 딜레마다.


딜레마가 클수록 가치가 크다. 대통령의 권좌는 권력의 크기만큼 딜레마도 크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딜레마에서 떨어지지 않고 이겨내면 국가의 미래를 밝히고 국민의 삶을 살찌우며,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잠시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모든 것을 망하게 한다. 우리는 모든 딜레마를 이겨내는 대통령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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