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질, 사내정치, 정치꾼, 정치판, 정치화
세계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팀을 선발한다. 그 포지션에는 누가 봐도 그 선수가 적격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실력이 그렇고, 자타가 그렇게 믿고 있다. 명단 최종 발표 직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연기됐다는 기사가 난다. 며칠이 흐른다. “전임 협회장이 힘을 썼다.”, “현 고문이 쿠션을 넣었다.”, “누가 누구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었다.” 무성한 소문이 돈다. 위원회가 개최된다. 그리고 그 포지션에는 다른 선수가 선발된다.
언론은 불공정 의혹을 제기하며 전문가들의 비판과 팬들의 항의를 함께 전한다. 협회는 선발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공정한 선발이었다고 발표한다. 선발 기준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협회는 내부규정과 보안, 그리고 공개할 경우 향후 공정한 위원회 운영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비공개 결정을 내린다.
한 중앙행정기관에 승진심사가 있다. 연차로 보나 그간 성과로 보나 그 직원이 이번에 승진할 차례다. 지난번에도 안타깝게 누락됐던 터라 이번에는 확실할 것으로 당사자도 기대하고 있고, 평소 그의 좋은 성품과 업무능력을 인정하는 동료들도 믿고 있다.
사실 지난번에도 승진이 확실시 됐었는데 공지된 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없어 다들 놀랐었다. 며칠 후 소문이 돌았었다. 그 직원이 동료, 후배들은 잘 챙기는데, 막상 심사위원인 국장들과의 관계가 별로라는 거다. 보고거리가 없어도 종종 찾아가고, 국장들이 참석하는 회식자리나 동호회에도 얼굴을 비춰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심사위원회에서 선임 국장이 “이 친구 누구지? 얼굴이 잘 생각이 안 나는데?”하자, 다들 “허허”하며 웃기만 하고 말이 없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거 같더라나.
승진심가 결과가 공개됐다. 이번에도 그 직원의 이름은 없었다. 며칠 후 소문이 돌았다. “정치권에 인맥을 가진 누군가가 장관을 통해 압력을 넣었다.”, “이번에 새로 온 차관이 먼 친척뻘인 누구를 밀었다.”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직원이 탈락한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연차도 성과도, 원만한 대인관계도 아니라면 도대체 승진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인사와 관련된 온갖 규정들을 만들지만, 진짜 인사는 규정 뒤에서 이루어진다.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기준의 공개를 요구하면 그 규정들을 앞에 내놓는다.
사실 인사규정과 인사위원회는 ‘인사 쇼’를 위한 무대장치다.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인사의 실체에 대해, 규정은 마치 그것이 공정하고 투명한 것처럼 관객의 착시효과를 일으키고, 다수로 구성된 위원회는 합의제라는 허울로 불공정, 불투명을 책임져야 할 주인공을 감춰버린다. 얼마나 완벽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내느냐,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쇼의 흥행과 연출자의 명성을 결정한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탁월한 업무능력을 가졌어도 승진해야 할 시점에 한두 번 탈락하고 나면 점점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 탈락했는지 알 수도 없고, 탈락의 원인이 당사자에게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는 다들 수군댄다. “이상하네. 승진 못할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모르지 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한 대기업에 신규 프로젝트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수십조 원이 투입되는 회사의 미래와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다. 선정되는 사업 아이템은 향후 수십 년간 직원들을 먹여 살릴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한 국가 경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각 사업부서의 신규 프로젝트 기획 보고서, 계열사인 경제연구소의 세계 산업동향 분석 결과, 해외 동종 업계 실태조사 보고서 등이 제출된 고위 임원진 전략회의에서 한 달 동안 보고와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제출된 12개의 예비 사업 중에서 3개가 추려졌고, 그룹 회장단과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하는 신규 사업 선정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됐다. 확보 가능한 모든 자료가 분석됐고, 국내외 전문가들과 그룹 내 연구 인력들의 의견까지 반영되었기에, 3개 사업 중에서 어떤 사업이 선정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룹 오너와 최고위 임원들의 의견에 따라 1개 사업이 최종 선정될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회의 결과가 나왔다. 제출된 예비 사업 3개가 반려됐고, 선정위원회는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 그리고 당초 고위 임원진 전략회의에서 탈락됐던 9개 사업에 대한 재검토 지시가 떨어졌다. 예비 사업은 5개가 됐고, 다시 열린 신규 사업 선정위원회는 한참 후순위에 있던 사업을 최종 선정했다. 언론에는, “그룹 오너만이 내릴 수 있는 승부사적 결단이었다.”, “비록 큰 리스크를 안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본 공격적 도전이다.”는 기사가 났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다. 선정 과정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규 사업으로 선정된 기획안을 제출한 부서의 장은 부사장급 팀장으로 승진해 신규 사업 추진을 총괄하기로 되어있었다. 순수하게 사업성만을 따져야 하는 경쟁이었기에, 이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는데, 그룹 내부 정보에 정통한 한 인사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부서의 장에게 이를 흘렸고, 결국 이것이 판을 뒤흔든 것이다. 고급 정보를 준 자와 받은 자 사이에는 당연히 거래가 있었다.
본래 정치(政治)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정치의 목적이자 요체는 ‘인간다운 삶’, ‘상호 이해 조정’, ‘질서 바로잡음’ 등이고, ‘다스림’, ‘권력 획득 및 유지·행사’는 부수적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목적과 수단의 순서가 뒤바뀌는 전도(顚倒)가 일어나고, 그 결과 변질(變質)이 발생한다.
정치는 오직 정치여야만 하는데, 변질이 되면 뭐가 더 붙는다. 정치질, 사내정치, 정치꾼, 정치판, 정치화. 이것들은 가짜 정치다. 가짜 정치는 불공정, 불편, 불합리, 명분, 허상, 주관적, 장난질, 부당, 억울함, 허탈함, 무력감, 절망, 체념, 분노,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들이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려 모든 걸 망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그 선수', '그 직원', '그 사업'이 될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고 변질된 가짜 정치를 퇴출하고 진짜 정치만 있는 나라, 정치에 뭐가 더 붙지 않고 그냥 오롯이 정치인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