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公務), 사무(私務), 여행
‘○○사업 추진을 위한 해외 선진 시스템 및 사례 연구’. 국민의 세금으로 다녀오는 수많은 공무국외출장들의 단일한 이름이다. 장관과 차관이 가고, 국장과 과장과 실무자들이 간다. 국회의원들이 가고 지방의회의원들도 간다. 힘이 세고 자리가 높은 사람이 갈수록 이름이 좀 더 거창해지는 측면은 있다. 출장명이 ‘양국 부처 간 ○○협력 강화’, ‘양국 의회 간 ○○ 소통 강화’ 등으로 바뀐다. 언론은 외유성 출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지만, 그때뿐이다. 예산은 계속 편성되고 출장은 계속 실시된다. 외유성(外遊性)은 외국에 나가 여행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성질이다.
공무국외출장은 과거 후진국, 개발도상국 시대의 유산이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 해외 선진국들의 우수한 제도나 실질적 발전상을 보고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선진국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보고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고, 또 우리가 나가서 전수하기도 한다. 관련된 예산도 편성되고 있고, 아마도 매년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도 선진 제도와 사례를 연구하겠다는 공무국외출장이 매년 최소 수천 개씩 추진되고 있다. 그렇게 까지 연구해야 할 것들은 과연 뭘까.
연구할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자료는 온라인으로 공유, 소유가 가능하다. 현장을 가봐야 한다고? 사진, 영상으로 직접 가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다. 온라인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랜선여행을 하는 시대다.
예산은 있는데 쓸 데가 없으니 쓸 데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공적으로는 아무 필요가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을, 반드시 필요하고 매우 의미 있는 일로 만드는 재주가 기획력이다. 우선 출장계획을 잘 수립해야 하고, 마무리는 출장보고서다. 사무(私務)는 철저하게 행간에 감추고 공무(空務)를 공무(公務)로 포장하고 부풀려서 계획을 수립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걸 잘하면 능력 있다는 칭찬, 에이스라는 평가를 받는다.
‘선진 ○○제도와 사례 연구’라는 공무국외출장이 있다. 우리나라에 ○○제도가 도입될 때부터 예산이 편성됐으니 그 역사가 최소 50년은 됐을 것이다. 최근 기준으로 1년에 3천만 원 정도 배정된다. 요행 나쁘지 않은, 즉 염치를 아는 장관이 부임하면, 일선 실무자들이 견문을 넓혀야 한다며 직원들에게 기회를 양보한다. 하지만 대개는 장관이 직접 출장을 간다. 장관은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스위트룸을 이용하기 때문에 수행 인력까지 동반하면 잔여 예산이 부족해져서 실제 업무 관련 인력은 최소화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한편, 세계에서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몇 나라가 안 된다. 다 선진국인 것도 아니다. 최대한 유사한 제도를 찾아봐도 몇 나라 더 추가되는 수준이다. 처음 해당 나라, 해당 제도를 담당하는 기관을 접촉할 때, 상대는 매우 반가워하며 굉장한 열의를 보인다.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가 몇 나라밖에 안 되다 보니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며 실질적인 교류·협력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많아도 한두 번이지, 출장이 더 반복되면 당황스러워하다가 나중엔 약간 이상하다는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다가 결국 출장의 실체를 눈치채고는 불편한 내색을 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이 후진국이 되는 순간이다.
예산은 불용하면 삭감된다. 한번 삭감된 예산의 재반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담당자는 문책을 당한다. 그리고 공무국외출장의 이름이 날아가고 난 빈자리에 담당자의 이름이 남을 것이다. 역사에 길이길이. “50년을 이어온 공무국외출장인데, 그래 그거 하나를 적당히 집행을 못해서 날렸을까.”
공무국외출장 전반에 대한 현황조사와 실태분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예산 편성은 그 보수성으로 인해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관행적으로 전년도를 답습한다. 공무국외출장 관련 예산도 대부분 전년도 집행률에 따라 그대로 반영된다. 따라서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 일단 모든 공무국외출장 예산을 제로로 만들고, 개별 출장 건에 대한 기관의 신청을 받아 그 불가피성과 소요금액을 심사하여 결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것이다. 물론 반드시 국외출장이 필요한 공무가 있다. 사실 관행적 편성과 집행으로 인해 정말 필요한데 가지 못한 국외출장도 많다. 필요한 곳에만 집중하고, 그간 외유성으로 낭비됐던 막대한 예산은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일에 투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