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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세계의 지도자를 찾아서 1

by THE RISING SUN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1882~1945). 미국 제32대 대통령이다. 재임기간은 12년(1933~1945)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다. 대공황(1929~1933)을 뉴딜정책(1933~1938)으로 극복했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승전으로 이끌어 미국을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국제연합(UN) 창설을 주도해 세계 평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의 세계 지도국가 미국, 세계 지도자 미국 대통령은 루스벨트로부터 시작됐다.


루스벨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질(1874~1965)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1932년의 전후의 세계는 암울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3~1918)이 끝나고 아직 복구와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터진 대공황의 여파가 전 세계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1922년 집권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1934년 총통에 오른 히틀러의 독일, 193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의 스페인,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의 일본은 전체주의로 나아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 또한 세계 평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뉴욕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델라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인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와 보스턴의 백인 상류층 가문인 어머니 사라 앤 델러노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한 후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해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1905년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29세이던 1911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제1차 세계대전 도중이던 1913년부터는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했으며 1920년 제임스 M. 콕스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함께 낙선했다.


1921년 캐나다 캄포벨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반신불수가 됐으나 혹독한 재활훈련 끝에 부축 없이 걸을 정도로 회복하여 1929년 뉴욕 주지사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정부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과 일자리 사업 등 혁신 정책을 추진하였고,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소속 허버트 후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명문가에 많은 재산, 명석한 두뇌, 좋은 학벌과 커리어까지, 루스벨트는 분명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고, 부족한 게 없었다. 1921년 반신불수가 되기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큰 시련은 루스벨트에게 큰 약이 됐다. 이겨냈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시련과 극복의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시련이 크고 절망적일수록 좋다.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생명은 물론 일상생활까지도 불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시련, 집안, 재산, 두뇌, 학벌, 경력 같은 그간 그를 돋보이게 했던 모든 것들이 무소요한 신체적 시련과 극복의 경험은 분명 그를 크게 성장시켰다.


루스벨트는 엉덩이와 다리에 철제 교정기를 착용하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면서 몸을 회전시켜 짧은 거리를 혼자 걷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하고 연습했다. 또한 물을 통한 물리적 치료(Hydrotherapy)의 효과를 발견하고 1926년 조지아주 웜 스프링스에 재활센터를 설립하였다. 1938년에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을 설립하여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시련 극복의 경험이 자신을 성장시켰음은 물론 여러 가지 공익적 사업의 계기가 됐고, 그런 이미지가 정치인으로서 성공하는데 대중에게 크게 어필됐음도 또한 분명하다.


루스벨트가 시련을 극복하고 모범적인 정치인으로 성공한 데에는 정신적 지향점이 되어준 종교와 스승의 역할도 컸다. 루스벨트는 메사추세츠주 그로턴에 위치한 성공회 소속 기숙학교인 그로턴스쿨에 다녔는데, 재학 당시 교장이었던 엔디콧 피바디는 늘 기독교인들의 의무를 강조하였고, 구체적 실행 방안으로 공직에 참여할 것과 불우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루스벨트의 결혼식을 주례하고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만남을 지속하며 루스벨트의 생애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되어 대공황을 극복하고 전란에서 세계를 건져낸 삶의 궤적이 그의 스승이었던 엔디콧 피바디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제 정치 지도자로서 루스벨트의 실질적 역량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정확한 상황 판단과 적확한 대응으로 대공황을 극복했다. 경제 위기에 대한 루스벨트의 정책은 크게 구호(救護), 회복, 개혁으로 정리된다. 실업자들에게는 구호가 시급하고, 경제는 대공황 회복해야 하며, 금융과 은행 시스템은 개혁되어야 했다. 취임 직후 긴급은행법을 시행하고, 연방준비은행에 지폐 발행권을 부여해 주식시장을 안정시키고 은행의 공황 상태를 종결시켰다. 이후에도 증권거래위원회, 예금보험공사, 연방통신위원회를 설립하고 전국노동관계법을 제정하는 등 대공황의 근본적 원인이랄 수 있는 금융·통신·노동 분야의 규제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공공사업국(PWA)을 통해 댐, 교량, 학교 등 공공사업을 주도하였고 민간보존단(CCC)을 만들어 농촌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25만 명의 실업자를 고용했다. 또한 추가로 공공사업진흥국(WPA)을 설립해 운영 첫 해에만 300만 명 이상을 고용하는 등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흔히 뉴딜을 대규모 공공사업 추진 같은 경기 부양 정책이 전부였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뉴딜은 또한 시장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부당노동행위 금지, 최저임금제도, 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노동권과 복지의 근간을 마련하는 정책이었다. 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 교섭권 보장, 실업보험, 퇴직자·장애인 연금, 공정거래제도, 빈민구제제도 등 미국의 노동, 복지, 금융 관련 주요 기관과 제도들의 원형이 사실상 루스벨트 정부에서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재건금융공사를 통한 철도·산업 분야 자금지원과 같은 정적 허버트 후버 전임 대통령의 정책을 확대하는 등 정파를 떠난 실용주의적 면모도 보여주었다.


둘째, 통합과 화합을 이끌어내고 때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치력이다.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1기 선거 기간과 임기에 해당하는 1932~1936년을 미국의 정치적 재편기로 간주한다. 루스벨트는 57%로 승리했고 6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뉴딜은 정책이기도 하지만, 또한 남부 백인과 북부 흑인, 지식인들과 농민들, 대도시 정치단체와 노동조합,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인들까지 그간 분열되어 있던 이질적 그룹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연합이기도 하다.


루스벨트에 의한 뉴딜 연합의 창설은 미국의 정치지형을 변화시켰고, 학계에서는 이를 “뉴딜 정당 체제” 혹은 “제5차 정당제”라고 불렀다. 민주당은 남북전쟁 이후 1929년까지 상원과 하원 모두를 장악한 적이 거의 없었고, 17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단 4번 만을 승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이후 1932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당은 대체적으로 상원과 하원 모두를 장악했고 12번의 대통령 선거 중 8번을 승리했다.


루스벨트는 또한 공식적, 비공식적 권한을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목표를 높이고, 추진력을 만들고, 충성심을 고취시킴으로써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한편으로는 경쟁을 조장했지만 동시에 열정과 창의력을 촉발시켰다. 여러 사람에게 한 가지 일을,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일을 나누어주면서, 최고 경영자, 정보의 집결지로서 자신의 입지를 충분히 활용했다. 또한 내각, 의회 등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은 설득, 조화 등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국제연합의 창설을 주도한 외교력, 그리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진정성이다. 루스벨트는 1기 행정부에서 중립법을 제정하면서 고립주의적 대외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나 대전의 개전 이후에는 영국에게 구축함을 지원하고, 무기대여법을 제정하면서 비참전 상태로 연합국을 지원했다. 무기대여로 시작된 물자 지원은 영국의 전쟁 수행능력 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은 영국과 일련의 협상을 진행했고, 유럽에 대한 협력과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 후에는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과, 프랑스의 해군은 완전히 괴멸되거나 규모가 크게 줄어든 반면 미국과 영국 두 나라만 대함대를 보유하게 됐다. 특히 세계 곳곳에 미치던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주요 거점들을 넘겨받은 미국의 해군력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강됐다. 결과적으로 다극적 질서는 붕괴되고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의 바다, 더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가 성립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대중과의 소통에서도 탁월함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노변정담(Fireside chats)이 유명하다. 취임 직후인 1933년 3월 12일부터 1944년까지 총 30회에 걸쳐 주요 정책에 대해 국민에게 직접 설명했던 저녁 시간 라디오 담화다. 또한 수많은 연설을 통해 유명한 어록들을 남겼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후퇴를 전진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노력들을 마비시키는 막연하고, 이유 없고, 근거 없는 두려움 말입니다.”, “진보의 척도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보태주는가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제공하는가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억압, 불의, 증오도 우리 문명을 공격하기 위해 의도된 쐐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유는 수여될 수 없으며, 쟁취해야 합니다.”, “우리만 행복하고 풍요로운 오아시스가 되려고 한다면, 미국은 결코 존속할 수 없다.”, “정치에 있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건 없다. 만약 우연히 일어났다면 그건 그렇게 계획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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