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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pr 05. 2024

늙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힘을 잃는 것이다

모리스 라벨


통영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통영을 며칠 다녀왔다. 어느 날은 봄 햇볕이 따가운 오전에 아내와 함께 묵고 있는 호텔에서 가까운 동피랑을 산책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구안 해안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매일 저녁에는 벚꽃길을 따라 운전하면 금방 닿을 수 있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했다.


그날의  피악노협주곡은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음악이었다. 모리스 라벨을 처음 알 게 된 것은 대학교 다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 ’남과 여’((1966)를 연출한 끌로드 를르슈감독의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 Les uns et les autres)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영화 속에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Bolero)에 맞추어 춤을 추던 조르주 돈(Jorje Donn)을 보았다. 15분 가까이 ‘단조롭고 여리게 시작하여 점점 강하고 웅장하게 펼쳐지는’ 반복의 중독성이 있는 음악과 남자 무용수의 새의 날갯짓 같은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춤사위에 매료되었다.


 캐스터네츠 대신 울림판이 부착된 작은북을 일정한 힘과 속도로 단조롭게 반복하는 그 리듬의 중독성에 빠지고 말았다. 그땐 몰랐지만 그 작은북의 명칭이 ‘스네어드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작은북은 스내어를 붙이고 쳐서 내는 소린데, 북면을 칠 때의 진동이 스내어에까지 전해져 같이 떨리기 때문에 특유의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그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에는 양손으로 동시에 피아노를 쳤건만 이번 곡에서는 오른손은 피아노머리를 잡고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에는 ambidextrous(양손잡이의, 양손을 다 쓰는)라는 단어와 simultaneously(동시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멀리 음악회까지 와서 집중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암기교육의 시대를 살았던 폐해가 나타나다니 하고 어둠 속에서 헛웃음을 삼켰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 공부했던 ‘Vocabulary 22000’의 5%도 미처 사용하지 못하는 영어소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엔진의 검색의 시대에 살고 있고, 사유하지 않는 단순 암기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4월의 봄날, 우리가 정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일들은  따로 있다. 죽은 사람들을 자꾸 기억해 줘야 두 번 죽지 않으니까. 지금은 무엇이든 팩트가 궁금하면 바로 검색하면 된다. 다행히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은 아내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연유가 금방 이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중 러시아 전선에서 오른팔에 총을 맞고 팔을 잃었다. 빈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이 끝나고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라벨뿐만 아니라 당대의 이름난 작곡가에게 왼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의뢰했는데, 그 곡이 그중의 하나였던 것이었다.



 한편, 그 암기실력으로 딴 자격증 하나로 평생을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동안의 삶과 달리 뜬금없는 얼굴로 세상과 이웃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격과 인성은 얼굴에서 드러나고, 생활과 성실함은 체형에서 드러난다 “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뭐,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냥 일관성 있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지금 그의 주의주장보단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둘러보면 된다. 선거가 뭐길래, 그동안 자신이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고, 정치적 신념은 온데간데없이 이합집산, 간판 바꿔달기를 손바닥 뒤집 듯한다. 그 천박함은 인생의 재앙이고, 수치심을 잃는 것은 시대의 재난이다. 투표를 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정치에 대한 불평은 하면 안 된다.



 독일출신의 유대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후, 남미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붙잡혀 온 학살 책임자, 나치 전범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다 그 아히히만의 변명, 그냥 정부에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다.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그 영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 가끔 친한 친구나 후배들이 헛소리를 할 때, 누군가는 옆에서 ”생각 좀 하고 살자 “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생각이 맞든 틀리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맞으면 맞는 대로 그 생각을 잘 정리하면 되고, 틀린 것을 알았다면 빨리 인정하고 다시 그 생각을 바로잡으면 된다.


자신의 생각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것이니까. 무엇이든, 한두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때는 한 번쯤 그 이유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 문제는 꽉 막혀 있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잃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우리가 늙는 것이고, 매우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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