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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y 09. 2024

일상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이다

변산


 어느 날 문득, 아내가 변산에 마실을 다녀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 ‘변산’(2018) 밖에는 기억나는 게 없는 동네였고, 아내의 말처럼 마실을 다녀올 만한 우리 동네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여행 블로그를 둘러보고 있던 아내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변산 바닷가에 샛노랗게 피어난다는 유채꽃도 볼 겸 여행을 다녀오자는 이야기란 걸 알게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방황하고 지혜로운 자는 여행한다’고 하니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노벨 변산, 닭이봉


로맨스 영화 ‘변산’은 ‘왕의 남자’(2005)로 천만 관객을 매료시킨 존경하는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였다. 고향 변산을 떠나 래퍼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학수(박정민)가 그를 짝사랑했던 선미(김고은)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어릴 때 친구들과 재회하고, 이런저런 사건에 엮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게 연출한 영화였다. 또한, 그 영화에서 선미가 학수에게 했던 말,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는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테트라포트, 격포항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라는 영화 속 학수의 시처럼, 서해안은 해 질 무렵이면 언제나 노을이 아름답다. 한 때 이준익 감독이 했다는 말, ‘남자는 철들면 재미없다’라는 말을 잊지 않고 기억했던 때가 있었다.


 무언가 설명할 순 없었지만 문득 철이 들면 정말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이나, 어떤 사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스파이처럼 어느새 철이 들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변산 채석강, 전북 부안


 하지만, 정확하게 철이 들었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철이 들었다는 기준과 판단은 주관적일 수 없고 객관적인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래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임원의 말이 생각났다.


 한 때 그 임원과 함께 일했지만 회사를 그만두었던 후배, 그 당시엔 철이 없어 회생생활은 물론 개인생활까지 철이 없었던 그 후배가 회사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 임원과 함께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돌아간 후, 나도 그 후배를 익히 알고 있던 분이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나누었는지 여쭤보았다.



 그 임원이 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오랜만에 어떤 일로 찾아왔는데, 그 후배 스스로 자신이 정말 달라졌고 지금은 교회에도 열심히 나간다면서  많이 철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임원이 바로 말하길  “전혀 변하지 않았고, 철들지 않았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놀라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말씀인즉, 정말 철들고 변했다면 자기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떠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금방 이해할 순 없었지만, 훗날 그 임원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임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나 역시, 그런 기준으로 보면 아직 철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긴 겨울을 견뎌내고 그저 소리 없이 꽃을 피워내고 푸른 잎을 돋아내는 자연처럼, 앞으로도 더욱 묵언하심, 용맹정진할 일만 남았다. 나와 함께 가장 오래 생활하고 있는 아내로부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데, 요즘 너무 철이 드는 것 아니냐며 걱정할 때쯤에나 조금 철들었나 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남자는 철들면 재미없다’는데 얼마나 좋은가. 사실이 그렇다.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어야 혹시 철든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이 들 텐데, 아직까지 나는 사는 게 재미있기만 하다.


 오히려 사회생활할 때, 정말 사는 게 재미없을 때가 많았다. 지금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모든 계절의 변화가 재미있다. 매일, 소소한 일상의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일상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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