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곤 한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의 이익도 챙기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유명한 책 중에 하나인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내 모토라고 하면 될까. 과거의 나는 남에게 피해 줄까 봐 사소한 것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살았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교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눈을 뜨면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눈을 한 번도 뜨지 않기도 하고,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의 말이 곧 법이라고 생각하여 그 말이 잘못된 말일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선생님의 말을 따르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실수로 다른 사람의 발을 밟으면 큰일이라도 난 것 마냥 '죄송합니다'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렇듯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고, 지금도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 과거 나의 착함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인한 착함을 넘어서 무조건적인 착함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호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성향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나타났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난 뒤에는 이러한 성향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향을 일련의 사건들이 한 번에 바꾸어주지는 못했다. 대학시절 다수의 동기들이 나에게 수시로 '부탁을 위한 연락'을 했고, 자신들의 부탁이 수락되면 곧바로 연락을 끊었다. 이런 경우를 몇 번이고 당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거절을 하지 못했다. 또한, 상대방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데 생일 선물을 보낸다든지 졸업논문을 쓰는데 성심성의껏 도와준다든지 하는 일들도 있었다(이런 일들은 그냥 내 만족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착하다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착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착하기는 하지만 나 자신에게도 착하게 사는 그런 착함으로 말이다.
나의 착함은 일단 타고난 성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말씀으로는 부모님 속 안 썩이고 클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고 했다. 이런 성향 때문일까 나이를 점점 먹어감에 있어서도 타인의 말을 수긍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수긍할 때는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그냥 나에게 A라고 말하는 상대가 있으면 그건 A인 것이었고, B를 해달라고 부탁하면 그냥 B를 해주었다.
이렇게 타고난 성향인 것도 있는데,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은 나의 인정 욕구였다. 나는 생각보다 유달리 인정 욕구가 높은 사람이었다. 이런 나의 인정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착함이라는 방어기제(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을까)를 사용해오고 있던 것이다(어떻게 보면 사랑받고 싶은 욕구도 포함된 거라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디 내가 원하는 데로 모두가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던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의 착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는 곧 나의 인정 욕구를 부정당하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착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내가 호구로써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저 그런 삶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내가 노력해서 나를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구나라고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착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호구로 생각하든 말든 나는 나의 신념을 지키면서 <냉정한 이타주의자>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삶의 주체를 타인에게서 나로 다시 되바꾸려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의 인정을 먼저 존중하기에 '나의' 결정과, '나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있는 착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