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할 데가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_24.11.13
나의 고민은 글 속에 털어놓는다.
친구들도 만날 수 없는 상황과 환경.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시점이 되어버릴 때. 나보다 더 못한 처지인 것 같거나 아니면 다들 분투하며 사는데 별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치부당할까 봐 두려워 일기나 쓴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 말이 맞다. 한 번도 내 뜻대로 된 게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무탈하게 살아왔구나 싶어서. 슬픔이 없지는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그 슬픔을 잘 이겨내 왔다.
요즘 나의 고민은 <나의 욕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받지를 않길 바란다><사람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잃지 않길 바란다>이다. 왜 이게 고민일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아니냐. 이미 욕심부리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이나 존경심을 잃어버렸다.
아이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생각이 든 것이다.
아이는 문제가 없지만, 내가 문제가 있다. 각자만의 성을 쌓고 있는 공동체를 신뢰할 수 없는 나의 불안이 문제다. 이런 시스템 속에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것인가. 그래. 학교의 문제만은 아니니... 문제를 나에게 접근해 보자면 내가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집은 어떤지. 우리 가정은 이 아이를 각자도생 하는 삶에서 지금 잘 키워내고 있는 건가. 기능적으로 잘 키워내기 위해 아이를 키워내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결국 본질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잘 꾸려나가는 아이로 커야 하지 않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다.
남편과의 대화 속에서 남편의 맞는 말에 나는 감정적으로 흔들렸으나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정이 필요했다. 불완전한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했다. 사회적 체면, 내 입장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그 순간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깨닫는 건.. 아 이게 <끝없는 욕심의 자기 합리화> 임을 깨달았다.
이 과정 속에 사실 하나(교육의 기능적인 부분)만 생각했지. 더 넓게는 생각하지 못했다.(교육의 본질) 마음속에 늘 담는 부분은 <아이는 말한 대로 크지 않고, 본 대로 큰다>이다. 아이들은 정말 본 대로 느낀 대로 큰다.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큰다면 다 바른 아이가 되었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도 인격체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배울만한 사람에게 배우고, 아니면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잘 사는 게 가장 먼저 필요한 부분임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부부가 교육문제를 논할 때, 이 부분을 말하지 않고 기능적인 부분만 얘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앞선다. 그게 문제였다. 하나의 결정을 하기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협상, 타협, 조절, 의견 나눔 등을 이 아이가 보고 배울 텐데. 나는 이런 부분이 부족하고 협동, 협상, 협력 이런 것을 잘 못한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나 보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내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집착해서, 내 마음이 앞서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이 잃어버리는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의견을 내고 공유하고 생각하고 조율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선을 이뤄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