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능력이 생겼습니다. 쓰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에겐 쓰고 싶지 않은 능력이 있는가. 질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얘기를 먼저 해보겠다.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이다. 딴 건 모르겠고, 남들보다 '긴 이동시간'을 잘 견디는 편이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 교회 학원 과외 지금은 직장까지. 기본 왕복 3-4시간은 땅바닥에 버리는 게 디폴트였던 근 10년간의 역사 탓에 아주 맷집이 단단히 생겼다. 긴 이동시간은 매일 내게 억울한 포인트였는데 쌓이다 보니 능력이 되어버렸다.
능력이 쓰이는 순간은 매번 달갑지 않다. 서울에서 약속이 잡히는 날이면 당연스레 넉잡아 두 시간을 비워둔다. 이것까진 그렇다 친다. 수도권에 사는 것을 누구한테 탓하리오. 하지만 두 시간을 달려가는 이 앞에서 "30분 이동도 힘들어, 절대 안가"란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욱하며 '이 서울깍쟁이' 한마디 외치게 된다.
알아주는 맷집에 이럴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야, 너 체력도 좋은데 네가 좀 더 고생해라."
아무리 力이 있다 해도 이런 뉘앙스의 멘트는 용서가 안된다.
'누가 이런 능력 써먹고 싶어서 길렀대요? 고생 안 해본 당신이 좀 해보시지'란 멘트만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그래서 억울한 능력이다.
'갖고 싶지 않은데 있고, 없으면 못살고, 그렇다고 써먹고 싶지 않은 능력.'
언제 한번 내 억울한 체력에 대해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듣더니 본인의 억울한 능력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억울 배틀이 시작됐다.
"난 억울하게 독립심이 강해. 누군가는 바라는 능력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길러진 능력이야."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이 한 줄이 꽤나 오래 남았다. 능력 이면에 담긴 삶을 조명하는 느낌이었다. 당시 친구에게 억울한 독립심의 배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그 속에 과거 아픔이 담긴 것 같았다.
깊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독립심 혹은 책임감은 흔한 억울한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전국에 계신 K-장녀 장남들은 모두 공감하시려나, 태어나 몇 년간 부모 사랑 좀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딸린 자식이 생긴다.
자식도 부모도 아닌 위치에서 서성일 때 즈음 부모 손에 어깨를 툭 한 대 맞으며, 가정의 기둥이 된다. 태어난 대로 살았는데 능력이 주입됐을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응애응애 막내이므로 어쭙잖은 공감은 여기서 관두겠다.
이쯤에서 누구든 처한 배경에 따라 억울하게 생긴 능력이 하나씩 떠올랐을 것이다. 나야 고작 작은 체력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한 무게감이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난 그 무게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능력에 기대는 타인들과 달리 그 속내를 알고 또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 무게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나를 더 잘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억울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억울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능력은 '필요'에서 시작한다. 그 이면은 결핍 혹은 아픔으로 형용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쨌든 인생에 한 능력이 처절하게 필요했는데 그를 위한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능력 없이 계속 아플 수도 있잖아요..
당신에게 '필요'를 주었던 그 경험은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얻기 위한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배경은 억울할지 몰라도, 당신은 얻은 능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능력이 있는데도 쓰길 거부하면 아무 능력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뿐이다.
원래 능력은 써먹으라고 있는 거라고, 그냥 그 능력과 내가 운명이다 생각하고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고 나서 제 능력이 쓰일 곳을 찾았을 때, 키를 꽂은 듯 과거와 미래가 통하는 순간을 즐기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나니 내 인생과 장거리 이동은 마치 운명인 듯 들린다. 억울하네 동시에 '어디로 더 튀게 될까' 쓸데없는 기대도 품게 된다.
그러니,
"야, 너 능력 좋은데 네가 좀 더 고생해라."
"..."
좀만 더 생각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