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메디오스 May 04. 2023

세상살이, 떡볶이

 아이들은 도무지 5분도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한다. 수업 진도는 맞춰야겠고, 아이들은 책 속 활자보다 선생님 머리 뚜껑 열기에 열과 성을 다한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녀석, 갑자기 책상 밑에 숨는 녀석, 자기 요가 실력을 자랑하겠다며 의자 위에 올라가 다리 한 쪽을 위로 쭉 뻗어대는 녀석 등을 다독이며 어떻게든 수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나는 옷걸이에 걸린 빨래마냥 몸을 의자 위에 늘어뜨린다. 이대로 의자와 한 몸이 되어 무기체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무기력에 기꺼이 잠식당할 때쯤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산통을 깬다. 


 삶의 의지는 누가 뭐래도 허기로부터 나온다. 돌이라도 씹어 먹겠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두루마리 휴지를 목이 막힐 때까지 입에 처넣었다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뱃속을 파고드는 허하고 선득한 감각이야말로 무기력을 퇴치해내는 최고의 무기다. 


 길을 따라 5분쯤 쭉 내려가면 프랜차이즈 분식집이 하나 보인다. 저 멀리 제주도를 넘어 교포사회까지 진출했다는 초특급 문어발 점포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모험 울렁증에 시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미쉐린 등급 레스토랑들보다도 위대하다. 어느 곳을 방문하든 소스부터 재료까지 모두 똑같다는 것, 보장된 맛이라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퇴근시간을 훨씬 넘긴 시간대의 분식집은 고요하다. 주문마저 누락되는 게 일상다반사일 만큼 붐비던 점심시간과는 사뭇 다르다. 몇 안 되는 손님들은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일상 속 소음으로부터 도피한 채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대중교통이며 전화벨, 고함치는 상사들에게 시달려온 이들에게 버튼 한 번으로 세상의 소음과 단절시켜주는 이어폰은 생명줄 그 자체다. 온종일 모니터와 서류를 살폈을 두 눈은 스마트폰 속 화면만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음식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젓가락만이 그들의 생존 의지를 증명한다. 


 나 역시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메뉴판을 쭉 훑는다. 가로 3칸, 세로 약 20열로 꾸려진 메뉴판 속에서는 김밥류부터 찌개류, 돈까스에 각종 면 종류까지 다채로운 메뉴들이 꿈틀댄다.  그러나 내 선택은 결국 떡볶이다. 붉은 실이라도 걸린 양,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와 나 사이에는 있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또 다른 장점은 조리가 빠르다는 것이다. 가요 두어 곡쯤 지나고 나면 모락모락 더운 김을 피어내는 떡볶이가 식탁 위에 자리해 있다. 동그란 접시 위에 라면과 오뎅, 떡과 삶은 계란이 어우러져 달곰함과 얼근함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한입 물어보기도 전에 혀가 먼저 안달이 나 있다. 한입 꼴깍, 침을 삼키고 나서 나는 얼른 젓가락을 옮겨 계란부터 집는다. 


 계란은 노른자부터 먹는 것이 좋다. 노른자를 흰자로부터 떼어낸 후 빨간 양념 국물을 가득 묻힌다. 퍽퍽한 노른자가 국물과 한데 엉기고 나면, 소스에 젖은 마늘빵마냥 부들부들하다. 두세 번 씹어 넘긴 후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혀끝에 맴도는 알싸한 기운이 싸하게 가시는 것이 상쾌하다. 


 나는 밀떡보다는 쌀떡을 선호한다. 한국인은 반드시 삼시 세끼 쌀을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과,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나 사이의 훌륭한 절충안이다. 고추장에 밥을 비벼댄 비빔밥이나 고추장에 쌀떡을 비벼댄 떡볶이나 본질은 같다는 나의 주장에, 단 한 번도 음식 철학으로 어디서 져 본 적 없던 어머니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밀떡과 쌀떡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혹자는 밀떡은 탱탱하고 쌀떡은 쫄깃하다는데, 미식의 티끌도 모르는 나는 한 번도 쌀떡과 밀떡의 차이를 체감한 적이 없다. 그저 둘 다 탱탱하고 쫄깃하다. 양념만 잘 발려 있다면 뭐든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접시 안에 떡이 얼마나 담겨 있느냐, 그뿐이다. 


 특정 음식에 애틋한 사람 따위 요리만화 속에서나 산다며 조소하는 이도 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삶을 나는 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곧 사라질까 두려운 엄마의 손맛 같은 것들, 특별한 추억을 담은 동네 맛집 같은 것들 말이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추억의 한 토막. 내게는 떡볶이가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졸업앨범은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30년 가까이 지난 초등학교 시절이 어제 일처럼 선명한 것은,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나를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탓이다. 


 어린이들도 악마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일찍 깨달았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장장 3년간을 동급생들의 먹잇감으로 살아온 덕이다. 통성명 후 동명이인인 것이 불쾌하다던 그 아이는, 그날 이후로 무리 지어 나를 괴롭혀댔다. 수업 시간 중 내 뒤에 앉아 사인펜으로 내 옷에 낙서하기, 여자 화장실까지 쫓아와 내 용변 시간을 재고는 복도에서 고래고래 외치기, 상의를 잡아당겨 가슴을 보고는 작아서 불쌍하다며 제 무리와 수군거리기 등. 흉흉한 기억들이 너무도 많아 지금도 때때로 잠 못 들고는 한다. 한데 뭉쳐 동급생이나 괴롭히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가관이건만, 당시에는 매일이 지옥도를 걷는 시간이었다. 몇몇 친구들이 도와주기도, 선생님이 나서 중재하기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버티는 날이 길어지다 보면 지렁이가 꿈틀대는 날이 오기도 한다. 그 아이가 내 지갑에까지 손을 댔을 때, 나는 내가 다른 이를 할퀴고 때릴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 알았다. 그 아이에게 입힌 작은 생채기의 대가로 온몸이 엉망이었지만 나는 후련했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내 꼴을 본 부모님께서 어떤 표정을 지으실는지, 내 꿈틀거림이 더 큰 지옥을 불러오지는 않을는지. 집으로 향하는 두 다리가 커다란 추를 매단 듯 무거웠고, 수분이 다 빠진 몸은 술 취한 행인마냥 비틀비틀 걸음마다 각종 알파벳을 그려댔다. 


 더 서글펐던 것은 뱃속의 아우성이었다. 이토록 비참한 순간에도 인간의 몸은 끈질기게 생존을 요구한다. 입초리가 꿈틀대며 연신 헛숨을 내뱉던 때 매콤함이 실실 코를 간질였다. 냄새의 방향을 찾아 이리저리 돌려대던 두 눈이 곧 파란색 트럭에 닿았다.      


 시야마저 흐려질 만큼 뜨거운 김을 가득 내뿜는 트럭 좌판대 위 온갖 음식들이 나를 꾀어냈다. 작은 산을 이룬 순대더미와 꼬마김밥, 꼬치에 꿰인 십수 가지 오뎅들이 산해진미처럼 반짝였다.


 그중에서도 내 감각을 온통 난도질하는 것은 떡볶이였다. 걸쭉하고 빨간 국물 속 둥둥 떠다니는 길쭉한 밀떡과 어묵들, 그 사이사이 매끈한 삶은 달걀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 통통하고 존득존득한 떡을 한입 베어 물 수만 있다면! 빨간 양념 한 숟가락 부어 퍽신해진 삶은 노른자 하나만 혀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댈 수만 있다면!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아이들에게 빼앗긴 용돈 중 상당수는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주머니 양쪽을 뒤지니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잡혔다. 떡볶이 한 접시는 1500원.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500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 떡볶이가 몹시도 간절했던 것 같다. 트럭으로 다가가 떡볶이 국물을 휘휘 젓는 주인아저씨에게 떡볶이 500원어치를 먹을 수 있는지 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어묵 국물을 담는 데 쓰는 종이컵을 하나 꺼내고는 거기에 떡 몇 개를 담아 내밀었다. 나는 꾸벅 고개 숙이며 감사인사를 하고는 얼얼한 턱과 혀를 움직여 떡을 씹기 시작했다.


 온종일 뜨거운 불꽃에 온몸을 녹이고 또 녹인 떡의 쫄깃함을 비할 데가 어디 있을까. 고춧가루와 물엿을 한데 섞어 걸쭉한 양념을 휘휘 저어서 후루룩후루룩. 천국의 맛이라느니 이 맛은 국보급이라느니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라느니, 상투적인 표현들조차 그 때 내가 느낀 미각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나는 그 때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이것을 베어 물고 부수고 삼킬 수 있음에 감사했다. 떡볶이가 매워서인지 지금 이 순간이 서러워서인지, 솔솔 피어오르는 가스 냄새에 눈이 아파서인지, 눈물이 살끔 나옴에 나는 조금 훌쩍거렸다.  


 몇 개 안 되는 가래떡들을 다 먹어갈 때쯤, 주인아저씨가 슬그머니 종이컵 하나를 더 내밀었다. 새빨갛게 물든 삶은 달걀 한 알이 들어있었다. 


 “목 막히니까 여기 오뎅 국물도 한 잔 떠 먹거라이….”


 목이 턱 막히는 듯해 나는 얼른 종이컵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계란마저 다 먹어 치울 때까지, 따뜻한 오뎅 국물 한 잔 홀짝거리다 자리를 떠날 때까지 아저씨와 나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저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이 떡볶이와 아저씨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로도 내 삶은 계속 흘러갔다. 나는 좀 더 꿈틀댔고, 그러다 지치면 그 트럭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그리고 좀 더 힘차게 꿈틀댔다. 나쁜 기억보다 더 많은 좋은 기억들과 함께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또 다음 단계의 삶을 밟아나갔다. 때때로 기운이 빠질 때면 어디서든 떡볶이를 먹으며 나를 충전해나갔다. 성공의 비결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열심히 싸워내는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말이다.


 인생은 희로애락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남은 생의 절반 또한 ‘로(怒)’와 ‘애(哀)’로 점철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씩씩하게 이겨내는 날도, 악당의 칼날 한 번에 소멸해버릴 단역들처럼 패배하는 날도 마주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때로는 전리품처럼, 때로는 전투식량처럼 나는 떡볶이와 함께하고 있을 것 같다. 빨갛고 쫄깃하며 매콤한, 나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끝>         

작가의 이전글 평범한 처절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