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주 Mar 22. 2020

신이여 거기 있습니까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

예수 없는 예수 이야기


  WARNING! 영화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꼭 관람하고 후기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리뷰는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보기 전에 알면 무지 재미없다.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까 말까 고민이 많이 됐다. 일단 너무 무겁고 가학적이다. 정말 볼만한 영화긴 한데 쉽사리 추천은 못하겠다. 나는 2019년이 끝나고 2020년이 시작되는 그 시간에 이 영화를 관람했고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그럴 줄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던 거... (물론 이후에 본 <어둠 속의 댄서>가 십만 배정도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렇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진수를 느끼고 싶다면 무조건 보고 넘어가야 하는 영화다. 오랜만에 머리에 피가 도는 느낌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갈 것이 있다. 나는 신의 유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스스로 반 크리스트라고 규정짓지 않은 상태이며 그들의 신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므로 참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유무 혹은 신앙심이 아니며, 다만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난 인간한테만 관심 있다.


세 줄 요약


 눈이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섹스를 하던 부부의 아이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다. 두 사람 중 특히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던 여자는 꿈에서 본 '에덴'이란 곳에 가고 싶어 한다. 남자는 여자가 말하는 숲 속의 오두막으로 여자를 데려간다.


 2009년 개봉, 라스 폰 트리에 우울증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이 영화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섹스하는데 정신 팔려 아이를 죽게 한 부부가 파멸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2시간의 가학 대잔치다. 정확히 말하면, 부부가 아니라 여자, 아내 혼자다. 이상하리만치 남자에게는 죄책감이 보이지 않는 게 이 영화의 기묘한 점이다. 오히려 남자는 여자가 겪는 내면의 혼돈을 잠재우기 위한 의사, 내지는 상담사, 내지는 교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가 겪는 죄책감의 이미지, 언어를 구체화해 여자에게 다시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여자의 회복이 얼마나 진행되는지 실험을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오두막'에 가게 되면서 전세역전의 극이 펼쳐진다. 남자가 광기 어린 여자에게서 도망치려 하자 여자는 남자의 다리에 철근을 박아버리고 페니스를 뭉갠다. 본인의 버자이나까지 자르고 나서야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장면을 보고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는데, 확실히 내가 가진 부위가 아니면 고통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리에 철근 박을 때까지는 막 아파 죽겠더니 남자의 그곳을 뭉개는데 별 감흥이 없더라. 관련이 없는 고통에 이다지도 공감하지 못하다니, 이게 바로 인간을 만든 신의 무심함이 아니고 무엇일까.


 중반까지는 영화의 내용이 영 이해가 안 갔고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죄책감이라는 게 그렇다. 내 일이 아닌 이상 그 크기가 얼마나 될지 도무지 가늠이 안될 수밖에 없다. 다르덴 형제의 걸작 영화인 <아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이와 함께 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얼마나 아플까'였다. 아니 그러니까 굉장히 아플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사실 별로 안 아픈 거 아닐까? 그런 잡생각이 들다 보니 본 영화에서도 여자가 아무리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한들 그다지 와 닿지 않고 자꾸 그 크기만 자꾸 가늠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밑밥이고, 사실 그 고통을 느끼게 된 원인을 찾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굉장히 극단적인 표현 방식이긴 하지만, 표현을 위해 이렇게까지 가학성을 더할 수 있다니. 감독의 실력이 과연 가공할만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쌓아나가기 위해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은 몸짓으로 발을 구르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 답게.


님은 어디로 가고 우리만 남겨졌는가


 그렇다면 그가 하려는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있었고, 아이는 발을 헛디뎌 창문에서 떨어졌다. 여자는 아이를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부모로서 느끼는 죄책감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 여자는 아이가 창문에 다가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 당장 아이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섹스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쾌락과 모성애 중 쾌락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 도달하면 이야기의 크기가 커진다. 우리는 쾌락과 모성애, 섹스와 순결, 창녀와 성녀로 구분되는 아주 유구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역사의 한가운데서 여자는 줄곧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점이며 감독이 기독교의 '원죄'에 던지는 질문이다. 하와(이브)는 쾌락을 취한 죄로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성녀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마녀가 되었고 사냥감이 된다. 아이가 죽기 전, 여자는 줄곧 '여성 살해'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수위를 넘어섰고 그 과정에는 분명 스스로 내재한 문화적 억압의 잣대가 개입되었다는 걸. 그럼에도 여자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채 자해를 감행한다.

 여자의 광기에 놀란 남자가 도망치려 하자 여자는 남자를 아주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죄책감을 혼자만 느낄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왜 혼자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가? 왜 남자는 부모가 아닌 것처럼, 죄가 없는 것처럼 굴며 여자의 죄를 사하려 하는가? 이는 기독교 내에서 벌어지던 핍박의 역사에 대한 찰진 비유이다. 여자의 죄와 남자의 죄가 다르게 대해지며, 심지어 그것을 사하기 위해 남자가 여자를 벌하거나 심판하던 마녀사냥의 역사 말이다. 두 사람이 숲 속에서 섹스를 벌일 때, 두 사람 뒤로 수많은 손이 나무의 뿌리 사이에서 뻗어져 나오는 것이 발견된다. 그들을 심판하고, 벌하고, 사냥하던 이들은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원죄는 왜 일방적인 살해만을 불러일으켰고, 왜 신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가. 여자는 이 모든 진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스스로 심판한 자신과, 아무도 심판하지 않아 자신이 해한 남자뿐이다. 신은 그들의 울음을 듣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섹스 혹은 자위 이후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현타?) 왜 우리는 만족만을 취하기가 힘들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신이 한 것일까,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일까. 인간이 야생동물과의 체급 차이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에 관해 여러 학자들은 '종교'를 이유로 들곤 한다. 믿음은 결속력을 만들고 결속력은 집단을 구성한다는 것. 그렇지만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분탕 종자의 싹을 걸러내야 한다. 집단 내에서 악의 역할이 필수적인 것이다. 안정적인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가족 형태가 유지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 섹스는 죄악이 되어야만 한다. 만들어진 죄악이 호르몬을 조절해 죄책감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진짜 죄악인 걸까 아닌 걸까.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기능한다면 신은 무능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속죄해야 하는가.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우리 손에 온전히 놓인 담론이다.


애매한 결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굉장한 거부감을 호소하곤 한다. 나 역시 이 감독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특히 어둠 속의 댄서!!!) 그는 누군가와 싸우는 것 같다. 확실히 그는 논쟁을 유발하는 족속이라 불편하지만, 그 싸움의 치열함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 나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의 치열함이 발돋움하는 곳으로 우선은 따라가기로 하며, 비평을 마무리한다.

작가의 이전글 진짜 너를 보여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