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잎들>
홍상수의 영화를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요즘은 딱 잘라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세간의 이슈 때문만은 아니다. 언제부터냐고 묻는다면, 음... 내 마음이 그다지 물렁물렁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부터 였던 것 같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만이 종교를 갖는다.' 바람이 부는데 붙잡을 게 없을 때 우리는 나무를 찾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말하자면 나무라기보단... 우리의 가장 연약한 마음을 비추는 창 정도 되겠다. 그의 영화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달래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비슷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자기비하에도 미학이란 게 존재한다고 느꼈고 그것 안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그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난 나는 더 이상 그의 영화를 보며 감동을 얻을 수 없지만, 대신 그의 영화를 좀 더 멀리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 이번에 본 영화는 비교적 최근작인 <풀잎들(2018)>이다.
세 줄 요약
카페에 앉아 하루종일 글을 쓰는 여자의 주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는 그들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품고 그것을 글로 옮기고 있다.
본 감독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홍 감독의 영화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사건, 인물들이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두번으로 그를 파악하긴 어렵다. 그의 영화를 보는 일은 마치 어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말수가 적고 뜬금없지만 눈길이 가는 그 사람은, 여러 번 관찰하고 말을 걸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각각 상황이 다른 인물들로 파편화되어 존재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상황과 말에 꽤나 심취해 있는데, 그들의 말은 결국 감독이 세상에게, 혹은 관객에게, 혹은 특정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나 불평으로 밝혀진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는 보면 볼수록, 오롯이 '홍상수'의 영화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영화 <풀잎들>은 2018년에 개봉했고, 이 시기는 홍 감독이 불륜으로 한창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던 때였다. 그전부터 홍 감독의 영화를 봐온 필자로서는 확실히 사건 이후 감독의 영화가 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성장했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노골적으로 변한건지 아니면 우리가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본 영화는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이 보는 세상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주인공이 보는 풍경은 네 쌍의 사람들로 분류되고 있다. 첫 번째 커플-연인 관계를 뜻하는 커플이 아닌, 한 쌍을 뜻하는 커플로서 쓰고 있다-은 죽은 남자의 애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얘기하는 체 하며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동정과 애정을 뿜어내고 있다. 두 번째 커플은 남자의 거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남자는 갈 곳이 없지만 여자는 맡아주고 싶지 않다. 세 번째 커플은 현재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과 합숙하며 글 쓰는 걸 도와주길 원하지만 여자는 그의 은근한 유혹을 거절한다. 마지막 두 사람은 연인 관계인데,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서 잘 아는 것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주인공은 그 모든 풍경을 보며 절규에 가까운 분노 감정을 글로서 표출한다. 노골적인 풍경에 대해서는 노골적이다 욕을 하고, 순진하면 순진하다 욕을 한다. 주인공은 그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그리고 그는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꽤나 멀리서, 피상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있다. 과연 뭐가 그렇게 불만인걸까?
“저게 정말일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너희들이 부럽다. 별 거 아닌 것들. 다 죽을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자기 죽을 건 생각 안 하는 것들. 그러니까 저렇게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
“좋다. 사랑이 최고야. 나머진 뭐 다 그게 안 되니까 하는거야.”
“결국은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쉽고, 너무 힘 있고, 너무 귀하고, 너무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 그렇다. 지금은.”
그가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그는 순수함을 부러워하고 증오하는 한편, 노골적임을 인정하면서도 혐오스럽게 여긴다. 주인공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보면 그는 마치, 이미 죽은 사람같다. 세상 밖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을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역시 세상의 일부다. 주인공은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동생 커플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고선 카페로 돌아온다. 카페에 있던 일행이 합석을 제안하자 그는 끼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결국 합석을 한다. 그는 이미 노골적인 쪽에 속한다. 감독의 영화와 평소 행실과 인생이 그것을 증명하며 그 역시 그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걸 알기에 그가 자조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혐오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지 않고, 죽기 전까진 살아야 한다는 걸 그는 매순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영화를 찍어대고, 버리고,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저 순수하고 싶다.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자신을 인정하고 싶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이런 점이 바로 그의 영화가 마니아층을 만드는 이유이다. 그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그 자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영화를 감상한 내 전 애인은 감독과 꼭 술 한 잔 하며 얘기하고 싶다며 담배를 펴댔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년 만에 본 이 작품은 전처럼 감흥이 크지 않았다. 왜일까. 그가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고 나 또한 그런 상념에 젖곤 했는데. 그 시기를 이미 지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고민은 여전하며 또한 여전해야만 한다. 예술가들의 가치는 그런 상념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더 있다고 생각할 때부터 였던 것 같다. 더 큰 세상, 다른 세상, 개개인이 가진 아주 신비로운 개인성과 각자가 사는 타임라인, 모순성 같은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뻔하지 않다는 걸 느낀 뒤로는 더 이상 세상이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감독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정말 아는가.
오랫동안 '안다'와 '이해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사이에서 방황해왔다. 그건 부모와의 관계에서 발현한 생각이었는데, 나는 부모를 분명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했다. 이 묘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몰이해와 그로 인한 다툼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고 나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은? 알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다짐은 영원 불멸하지 않으며 시시각각 바뀌기 일쑤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 하나가 있다. 시작점에서 안다고 확신하지 않는 것이다. 본 영화에서 주인공은 동생 커플에게 반복적으로 얘길 한다. '너네 정말 아니? 너네 정말 서로에 대해 알아? 알고서 사랑하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을 해?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니?' 그 과도한 절규는 너무 이상해서 마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는 본인이 한편으로는 순수하다는 걸 아는 것이며, 그는 그가 모른다는 사실 마저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이 모른다는 사실마저 알아서 불행하다면, 그 앎은 과연 진짜인가. 또 다시 묻고, 또 모름을 인정함으로써 차오르는 자기비하를 잠재워야 한다. 질문이 계속되는 이상 삶은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며, 불행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다. 질문은 계속 흐른다. 영화가 물어온 것처럼, 주인공이 물어온 것처럼 나는 감독에게 같은 것을 질문하고 싶다.
확실히 세상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영화감독 및 모든 예술가에게 있어 좋은 동력이며, 영화팬들에게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다. 그가 언제까지 정정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가 지금보다 더 많이 늙어서, 무작정의 순수로 돌아갈 날을 기대해 본다. 세기의 사랑같은 건 좀 그만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