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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May 05. 2020

단편영화감독으로 살아남기

그야말로 오지 체험의 현장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


 남는 시간에 취미로 써보고자 했던 영화 리뷰가 벌써 10개에 달했다. 기념으로 아무도 요청한 적은 없지만 사는 얘기나 좀 해볼까 한다. 소개에 나와있듯 필자는 영화를 전공하고 단편영화를 찍고 있는 아마추어 감독이다. 영화 찍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비평가라는 대비책도 마련해두고 있고, 그 외에도 작곡, 그림, 편집 등 이것저것 다루는 근본 없는 예술가다. 가장 좋아하는 말은 '쓸모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끼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다루고 있고, 좋아하는 것 역시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는, 쓸모없는 단편영화이다. 당신은 단편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필자 역시 대학 진학 전에는 단편영화를 본 적이 없다. 현재 단편영화를 찍는 감독들 역시 장편 극영화를 더 많이 볼 게 분명하다. 매년 단편영화를 다루는 영화제들이 꽤 많이 열리는데, 그곳을 찾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는 세상살이에서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무 효율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단편영화를 다루는 건 근본적인 모순이다. 매번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왜, 단편영화인가?


단편영화감독으로 살기


 단편영화와 상업영화, 그리고 관객 사이에 보이지 않게 그어진 선이 싫다. 나는 그 선을 언제든 넘나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 선을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크게 보면 모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저 세상이 생판 남의 세상인 것처럼, 구분을 짓고, 경계를 만드는 태도로부터 두려움이 생성되고, 차별을 향한 욕구가 생성된다. 이건 그냥 거시적인 얘기고, 단순하게 말하면 나는 단편영화로는 성공하지 못하면서 유튜브로는 성공할 수 있는 세상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다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람들도 원할 거라고 믿었다. - 필자의 일기 일부 발췌


1. 단편영화감독으로 살기란 말하자면 돈에 미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돈 있음 찍고, 없음 못 찍고"가 일상이다. 내가 돈이 없지 할 얘기가 없냐! 고 말하고 싶지만, 이야기도 그렇게 풍족한 형편은 아니다. 영화를 찍지 않는 시간은 예외 없이 허비되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현실에 맞닥뜨리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창들은 학교를 다시 가거나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등 자신을 계속 경쟁에 몰아넣는 길을 택한다. 학교에서 사람을 만나고,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비를 따내는 일련의 과정은 규모만 다를 뿐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출연자들과 다르지 않다. -서바이벌이 낳은 괴물들- 그러니 슈퍼스타 K에 나온 사람이 K팝스타에 재출연하고, 또 쇼미더머니에 재출연하는 일은 너무 익숙한 삶의 풍경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결과로 드러나지 않는 꿈, 실체 없는 욕망 앞에 좌절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2.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읽고 있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소유로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얄팍함을 한껏 비웃고 있다. 그렇지만 소유가 주는 만족감과 쾌락이 얼마나 큰 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당장 나는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갖고 싶어서 미치겠고, 잘 만든 완벽한 작품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방식의 소유욕은 장단점이 극명한데, 장점이라면 작품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이겠고, 단점 역시 욕구가 너무 비대해서 시작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만족할만한 작품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자아가 스스로를 망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이 패턴도 슬슬 익숙해지니, 자아가 너무 부풀 때는 스스로 좀 눌러주려고 한다. '아니야, 일단 초고만 써보자. 맘에 안 든다고 또 뒤엎을 순 없어.'


3. 가장 최근에 찍은 작품은 현재 영화제 출품 진행 중이고, 끝나면 스트리밍 사이트든 유튜브든 어딘가에 게재될 예정이다. 생각보다 영화제가 원하지 않는 작품이었다는 걸 1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 얘기 은근슬쩍 하나 끼워 넣자니까, 나는 감이 없는 주제에 참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독려하는 것은 필자의 오랜 습관이다. 혼자라는 물리적 상황을 극복하기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단면을 담은 영화는 어딜 가나 천덕꾸러기다. 그도 그럴 게, 도대체 끼워 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성과 삶을 주제로 한 것도 아니고, 여성이나 아이 등 집단이 특정하게 다뤄지는 것도 아니며, 현 시류와 관련이 있지도 않다. 스스로도 껴주고는 싶은데 마땅한 곳이 없다는 그들의 말에 조용한 공감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이야기란 게 원래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게 아니지 않나. 쓰다 보면 그렇게 돼버리는 것이고, 그렇다 해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내 새끼가 눈에 밟히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영화제든 뭐든, 어디에라도 보여지고 감상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장소나 명예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다. 관객과 소통할 수 없는 영화란,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거니까. 


4. 더불어 많은 감독들이 영화 관람 방식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내놓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스트리밍 사이트를 열렬히 환영하는 쪽이다. Z세대라 그런 거라고 말한다면 -Ok boomer- 딱히 변명할 말은 없다. 하지만 어디서든 보여지면 그뿐 아닌가.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집단 관람의 경험'이라는 매체의 큰 특성이 사라진다는 점인데, 물론 경험적 측면에서 어디서 보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혼자 봐야만 하는 영화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폰을 꽂고, 혼자서 봐야만 온전히 관람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떨까? 혼자 관람하는 영화의 이점이 뭐가 있을지는 계속 연구하는 중이다. 현 상황과는 무관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보는 영화를 더 선호하는 편에 속한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이 완벽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영화관을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사람도 있는가 하면, 혼자 보다가 멈추기도 하고, 또 뒤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면서 영화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5.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끝나는 기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영화를 찍는 일은 인생을 때우기에 매우 적절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필자의 경험상 단편영화 하나를 완성하는데 대략 1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부터 배급사에 넘기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데, 짧다면 짧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어쨌든 이 기간에 따라 인생을 나누면 앞으로 나는 50편가량의 단편영화를 더 찍을 수 있겠다. 70년 간의 활동 기간 동안 50여 편의 장편을 찍어낸 우디 앨런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양이지만, 내 인생이 50조각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면 또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굉장히 직관적인 사람이라는 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에 나는 모든 조각을 계획한 뒤 상황을 만들기보다 직관적으로 한 호흡에 훅 적는 축에 속한다. 때문에 그때의 감정과 기분을 잃으면 이후에는 어떻게 찍어야 할지 잊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찍는 내내 의도적으로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최근에 찍은 <이상하게 잠이 안 와>라는 작품은 자전적인 작품이었는데, 휘발되는 감정을 다뤘기 때문에 작가인 나조차도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기가 어려웠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찍기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의 틈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가했었다. 그래도 찍어두니,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보면 알겠더라. 


내겐 너무 낯선 단편영화


 바야흐로 '숏 비디오(Short Video)'의 시대다. 뭐든 짧고 강렬해야 한다. 영화에서 드라마로, 드라마에서 웹 드라마로, 웹 드라마에서 유튜브 비디오로 스토리텔링은 점점 시간의 압박을 받아가고 있다. 짧다고 해서 내용이나 깊이가 덜하다는 건 시답지 않은 핑계이며 선입견이다. 그러나 짧다는 것은 그 비디오가 시청자의 시간을 소유하는 양이 그만큼 적다는 것이고, 시청자 또한 비디오를 소유했다는 만족감에서 해방되기 쉽다는 말이 된다. 사라진 그만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시청자는 또 다른 비디오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단편영화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 수 있을까? 시대가 이렇다면, 단편영화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편영화가 조명을 받기란 매우 어렵게 보인다. 왜 단편영화는 막연히 재미없고, 실험적이라는 말을 듣고, 성능이 떨어지는 시험작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걸까? 만약 단편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거라면, 왜 이 상태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며, 멸망하지 않는 걸까?

 시대가 단편영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단편영화감독으로 살고 싶은 나 사이의 갈등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단편영화가 주목받길 바라는 나조차도 단편영화에 쉽게 손을 대지 않는 건 왜일까. 나는 그것을 '낯섦'에서 찾고자 한다. 낯섦이란 필자가 오랫동안 혼자 연구하고 있는 주제인데, 쉽게 말하면 사람은 언제나 익숙한 것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에게 그가 평소에 보지 않는 장르의 스페인 드라마, <엘리트들>을 추천한다고 해보자. 친구는 범죄 스릴러를 즐기지 않고 스페인 드라마를 본 적도 없으며 아는 감독이나 인물도 없어 시청을 꺼리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말을 듣자, 그는 1화라도 감상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진다. 이것은 그가 평소 넷플릭스 시리즈를 즐겨 보기 때문에 생긴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낯섦을 한 꺼풀 벗겨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친한 친구의 추천까지 더해지니 두 꺼풀, 이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다. 

 이렇듯 앎의 파이를 넓히고자 하는 욕구는 모두에게 있지만, 새로운 것으로의 접근성은 욕구보다 훨씬 뒤처지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을 단편영화가 발전하기 힘든 이유로 본다. 단편영화의 제작진은 대부분 아마추어 시네 키즈이고, 출연진 역시 전부 낯선 사람들이다. 게다가 낯선 주제와 형식까지 더해지면 그들을 찾을 이유가 관객들에겐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만을 거듭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낯섦에는 꽤 신비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 당신이 보고 있는 이 글이 당신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 역시 당신을 모르지만 우리는 브런치에 기고되는 글의 특성을 알고, 내가 전에 썼던 글을 당신이 알고 있으며, 나 역시 이 곳에 어떤 글이 써지는지 알고 있다. 그 작은 공통점들이 모여 낯섦을 순식간에 극복하고 만남을 종용한 것이다. 만약 이 말에 공감한다면, 그리고 내 글을 재밌게 읽고 있다면, 단편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더라도 필자가 찍은 단편영화를 한 번쯤은 볼 의향이 생기지 않겠는가? 거기에 유튜브 링크를 받는 등, 관람이 매우 쉽게 이뤄진다면 말이다. 낯섦은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낯섦은 스위치를 켜듯 즉각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질 수 있다. 이 긴 글을 향해 느낄 당신의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내겐 너무 ㅇㅇ한 ㅇㅇ'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인용하여 제목을 작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전히 많은 아마추어 감독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영화 관람의 새 시대를 여는 주인공들이다. 나는 그들이 나와 고민을 나누고 시대를 함께 일구어 나가는 미래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쓰다 보니 뭐랄까, 선전적인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자전적인 글을 쓰는 건 늘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새로운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나 자신이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감독으로서, 영화인으로서 당신에게 단편영화를 봐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당신이 보고 싶고 찾아가고 싶은 단편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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