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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지선 Mar 19. 2020

괴기다라이 갑니더

그림이 있는 수필

작품 「괴기다라이 갑니더」

10년도 훨씬 전, 우리 집에서의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남편과 딸과 아들, 모두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딸에게 물었다. “하드디스크는? 메모리가 몇 메가라고?” “아빠, 아마 200메가인가 봐요. 충분할 거예요.” “0S는?” “윈도우예요.” “엑셀은 깔려 있어?” “그럼요.”


나는 식탁과 싱크대를 오가며 먹을 걸 챙겨주다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들은 합창을 하듯이 “엄마는 말해줘도 몰라.” 그러더니 남편의 한마디. “니네 엄마는 지금 엄마를 죽인다는 소린지 살린다는 소린지 모를걸?” 하면서 같이 한바탕 웃었다. 그래, 그땐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나는 그 대화에 낄 수도 없고 딱히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 컴퓨터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 밖엔.


‘그래, 실컷 비웃어라! 컴퓨터를 모른다고 죽냐!’ ‘니네는 밥할 줄 아니?’ ‘김치 담글 줄 아니?’ ‘또 예술의 심오한 세계를 알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왕따 당한 서러움도 금방 잊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어느 날 마감일까지 전시자료 제출을 하지 않아 팜플렛을 만드는 출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 선생님, 오늘까지인데요.” “어쩌나 깜빡했네!” “그럼 메일로 보내주실래요?” “메일요?” “나 메일로 보낼 줄 모르는데….” 나는 그냥 부리나케 준비하여 교통지옥을 겪으며 전시자료를 직접 갖다 주었다. 나는 점점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림 살고, 아이들 키우고, 나름대로는 아침마다 신문도 읽고, 책도 읽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다. 세상의 한 가운데는 아니더라도 그냥 ‘밥하는 아줌마’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집에서도 가족들은 못 알아듣는 언어로 말을 하고, 사회에서도 가끔씩 내가 모르는 다른 방법으로 소통을 하지 않는가?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모르는 게 있으면 아버지에게 물어 본다든지 윗사람에게 물어야 했던 것을 언제부터인지 자꾸 아이들에게 물어볼 것이 많아졌다. 자연히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니 아이들은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른은 주눅이 들어가는 시대…. 


그러다 2001년 12월, 피렌체비엔날레에 참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갔다. 60개국에서 200여명의 작가가 참석한 행사였다. 이미 두 번째 참가라 조금은 위안이 됐지만 너무 많은 인종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의 홍수는 전시기간 내내 무척 두렵고 벅찬 스트레스였다. 보름간 그 많은 부스들을 돌며 그림과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


그 때 유난히 내 시선을 끄는 것은 부스 앞의 사각 노트북 하나였다. 외국작가 중에는 탁자 위엔 아무 종이도 없고 달랑 노트북과 팸플릿 대신 동그란 CD들, 그것이 작가를  소개하는 홍보자료였다. 모니터의 화면이 바뀔 때마다 나는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태껏 홍보책자나 인쇄물을 들고 힘겹게 다니는 나와는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그 속엔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오랜 세월 해온 많은 작품,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전시된 작품들이 평면작업은 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아 한쪽으로 밀리고 컴퓨터와 사진을 이용한 영상작품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곳 역시 컴퓨터를 모르면 이방인이었다. 물론 비엔날레의 취지대로 많은 그림을 보고 많은 작가를 만나고 왔지만 그들과의 진정한 소통은 힘들었고, 궁극적으로는 나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인식의 확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계치에다 숫자치에다 영어치까지 겸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지 않는가. 일단 한국에 돌아와 컴퓨터공부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나 자신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집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회사에 다니는 딸아이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았다. 컴퓨터를 끄고 켜는 법, 워드를 치는 법 등. 그러나 컴퓨터를 켜다가 갑자기 이상한 영어화면이 툭 튀어나오면 기겁을 하고, 아무거나 잘못 눌러 다른 파일이나 폴더를 망가뜨리고…. 식구들이 돌아와 컴퓨터를 못쓰게 만들었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급기야 엄마가 컴퓨터를 못 만지게 하자고 결의까지 하지 않는가!


내가 해주는 밥 먹고, 직장 다니고, 내가 사준 옷 입고 나가다니고 공부한다고 온갖 뒷바라지 다 해주었더니 이젠 나를 무식하다고 완전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거금을 투자하여 나만의 노트북을 사서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 때 작업실을 시골 양평으로 옮긴 나는 양평읍에서 컴퓨터학원을 찾아보았다.


10년전 양평에는 겨우 컴퓨터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기초반이 하나 있었다. 사실 기초도 모르면서 내 머리 속에는 피렌체에서 본 작가들의 최첨단작업이 가득하였다. 그 곳에서 컴퓨터 사용법을 잠시 배웠지만 그나마 인원이 줄어 그 반도 문을 닫았다. 그 당시 나는 사람만 만나면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 때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작품 「괴기다라이 갑니더Ⅱ」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여중고시절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였다. 그 복잡한 만원등교버스에서 몸빼 입은 아지메(아줌마의 경상도 사투리)가 “괴기다라이요, 괴기다라이 갑니더. 발 치우이소”라고 외치면서 막무가내로 비린내 나는 생선을 가득 담은 빨간 고무 대야를 손잡이를 잡고 겨우 서 있는 우리 발밑으로 밀어넣었다. 어린 나는 등교시간 아줌마의 억척을 보고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이 바쁜 시간에 버스를 타는 거야. 우리가 학교 다 가고 한가한 낮에 다니시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른 새벽에 생선을 자갈치에서 떼다가 동네로 가져가서 팔아야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고 먹고 살 것이 아닌가! 버스가 복잡하다든지, 학생들이 냄새를 싫어한다든지, 차장아가씨가 귀찮아한다든지, 그런 눈치는 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생선대야의 아줌마야말로 1960년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지금의 비지니스우먼, 당당한 CEO 아닌가. 한 평 가게도 없이 손에 든 생선대야와 한 벌의 몸빼가 전재산인 아지메…. 세월이 흘러 나도 아줌마가 되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아줌마들이 생각났다.


보통 생선을 담은 큰 대야 두 세 개는 조그만 생선가게를 채울 양만큼의 커다란 부피와 무거운 양이였다. 고등어, 갈치, 꽁치 등 수십 마리의 싱싱한 생선들을 달랑 버스표 한 장으로 운반하였다. 그리고 어떤 땐 “차장아가씨 차비 더 주께! 태아도이(태워줘)”를 외치지만, 일단 타고나면 암탉이 병아리를 감싸듯 생선대야를 보물처럼 보호하며 자신은 아무데나 털썩 앉았다.(참, 그땐 버스기사 옆 엔진박스 위가 지정석이었다.) 등교길 보수동에서 범일동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의 그 장면이 몇 십 년이 다 지난 지금도 내 가슴속 깊이 판박이가 되어 남아있다.


내가 노트북 앞에서 하루 종일 만든 작업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려 망연자실할 때, 딸에게 전화를 걸면 전화를 받은 딸아이에게선 “엄마 나 전화 받기 힘들어요, 회사거든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 엄마도 지금 큰일 났거든, 다시 전화 좀 해줄래?”라고 한 뒤 이곳 저곳 아는 사람에게 연락한다. “혹시 그거 아세요?” 그래도 안되면 노트북을 싣고 컴퓨터수리점으로 달려간다. 제발 주인이 자리에 있기를 바라며….


내 머릿속엔 오로지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 밖에 없다. 지금 알아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그나마 알던 것도 다 잊어버릴 것이고, 천신만고 끝에 만든 나의 작업도 다 날아가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 나도 괴기다라이를 든 부산아지메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반기는 사람 없어도 어디라도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어디가 고장인데요?” “그게 아니고 화면에서 내 파일이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무슨 프로그램으로 작업하셨는데요?” “그게 포토샵인지, 일러스트인지.” “어느 폴더에 저장하셨는데요?” “그것도 생각이 안나고, 그냥 ‘예’를 눌렸거든요.”


세월이 흐르고, 봉사문고리 잡는 어둠의 시절이 지나고….


아! 드디어 나는 해냈다. 몇 년 동안 심봉사 젖동냥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몇 개의 노트북과 디카를 갈아치운 뒤 이젠 작품을 디카로 찍어서 편집도 하고, 나의 동영상작품도 만드고, 웹하드로 자료 보낼 줄도 알고,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나는 이젠 우리 집에서도 왕따가 아니다. 작년에 어느 모임에 갔더니 나보다 젊은 남자가 “누님 정말 멋있습니다. 존경합니다”라고 찬사를 하지 않는가. “왜요” 했더니 “그 목걸이 말입니다”라고 한다. 이쁜 보석목걸이 대신 내 목에 반짝이며 걸려있는 까만 메모리카드 목걸이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아줌마가 그 목걸이를 한 것이 신기한가 보다.


‘그래, 나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빨간 괴기다라이를 만원버스에 싣고 다니는 몸빼 입은 아줌마다. 이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배워나가려면, 나도 절실하게 해야할 일들이 많거든.’ 나는 속으로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여학생 시절 만원버스에 빨간 생선대야를 사정없이 다리 밑으로 밀어넣던 부산아지메, ‘영원한 나의 멘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지메님! 참 장하십니더, 그리고 참말로 고맙습니더.”



이글은 <독서신문>에 게제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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