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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Jul 17. 2024

6755호실 (3)

기억 2-수채화 정물

매주 토요일에 그들은 미술실에 모였다. 각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모이는 시간은 거의 2시 무렵이었고 운동장에는 밥도 안 먹고 공차는 아이들만 떠들썩했다. 미술실에는 밍이 늘 있었고 소품 준비를 위해 참과 율이 먼저 오곤 했다. 수채화 수업이 벌써 석 달째 이어졌고 여름방학이 코앞이었다. 


미술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는 파란 비닐우산과 제법 신선한 생태 두 마리가 세팅되었다. 오늘 그리는 그림의 오브제였다. 사람들은 미술실에 들어서면서 눈을 크게 뜨고 생선에 집중했다. '저걸 그리라는 거야'라는 것보다는 어떻게 저런 생물을 이 더위에 갖다 놓았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보였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미술실에서 생태는 바로 상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시작하시죠.”

밍은 율이 사다 준 캔 커피를 손에 들고 빙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짓궂었다. 


“꽃과 과일은 많이 그려보셨으니까 오늘은 새로운 걸 준비해 봤어요.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별로 즐겁지 않은 저 생선을 준비한 율과 참에게 박수한 번 하죠?”

사람들은 생각 없이 박수를 쳤다. 


“물의 느낌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주제예요. 생선 자체도 물기가 탱탱하고 벌써 바닥에 물이 고이잖아요? 우산도 위에 물을 뿌릴 거예요. 여름비가 왔다고 생각하셔야죠? 화이트 당연히 자제하시고요.”

밍은 화분 물뿌리개로 펼쳐진 비닐우산 위로 물을 뿌렸다. 대개는 밑으로 떨어져 바닥을 적셨지만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파란 비닐우산은 나름 낭만적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간간히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일 테니 완성되면 여러 버전의 우산과 명태가 나올 것이다. 

나무 패널에 화지를 붙여 종이테이프로 고정한 캔버스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스케치 연필을 갖다 댔다. 비교적 쉽게 그려나가는 참과 싱의 화판을 그들은 훔쳐보곤 했다. 


“음악 선생님은 어떻게 그림도 잘 그려요?”

안경 낀 남자가 흘깃거리다가 본격적으로 싱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피려 일어섰다. 


“다른 데 신경 쓰지 마시고 집중하세요. 시간 얼마 못 드려요. 3시간입니다.”


“알았어요. 화장실 가는 길입니다.”

남자가 출입문 쪽으로 휙 나가자 사람들이 소리 내며 웃었다. 오랜만에 미술실 공기가 흔들렸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의 그림은 대개 엉망이었다. 그나마 싱과 참, 그리고 젠의 그림이 좋아 보였다. 어떤 이는 붓을 많이 대서 종이가 보풀처럼 일어났고, 중첩된 채색은 탁하고 썩은 생선을 만들었다.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보던 밍은 그들의 그림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 말로 충분히 그림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나는 밍의 차갑고 다소 건방진 태도가 싫었으나 그림에 대한 밍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물 좀 자주 바꾸세요. 게으름은 탁색으로 이어집니다.”

밍의 잔소리에도 사람들은 플라스틱 물동이의 물을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그나마 율과 싱, 그리고 참이 부지런히 수돗가로 드나드는 정도였다. 나는 밍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용감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중에 꼭 잔소리를 듣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야 그림에 대한 감상이 시작되었다. 그림이 끝나고 나면 늘 그래왔듯이 이 감상회를 사람들은 긴장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주의 사항을 지적받기도 하고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이 감상회를 즐기는 것은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의 주목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밍이 말했었다.


“내 그림을 건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죠. 물론 창피하기도 하고 내심 기대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결국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 아닌가요? 그건 본능이니까 숨기지 말고 그냥 즐거워하자고요.”

물론 그림의 평가는 밍의 몫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특별히 멋진 그림이 걸릴 때면 ‘오~!’하며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은 역시 참과 싱의 것이 탁월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저 물색 좀 봐, 어떻게 저렇게 정말 물 같을까? 명태 눈알은 살아있네.”


“죽은 명태 눈알이 살아 있으면 그건 아니지. 붉은색이 좀 들어갔으면 너무 죽어 보일까?”


“비닐우산이 기가 막히다.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참의 그림은 명쾌하고 산뜻했다. 붓을 몇 번 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우산이나 명태의 모습이 분명했고, 화면 전체에서 투명함이 뿜어져 나왔다. 참의 그림을 보던 밍이 만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귀가 닳도록 말씀드린 건데요. 수채화는 물맛이에요. 물 자주 갈아주셔야 되는데 안 그러셨죠? 구정물에서는 썩은 동태가 나올 뿐이라고요. 또 하나는 색의 중첩인데 그림을 고칠수록 망가지는 게 수채화입니다.”

밍의 말에 율이 자신의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는 물을 자주 갈고 덧칠도 최소화했는데 왜 이 모양이지요?”

사람들은 율의 그림을 보더니 입을 가리고 움찔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몸짓이 분명했다.  율의 우산은 명태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고 더욱이 명태는 웃고 있었다. 밍도 뭔가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율. 두 가지가 충족되면 뭐해요? 기본적으로 스케치가 좀......하여튼 우산과 명태의 비율을 보세요. 그리고, 명태가 왜 저래요?”

밍이 웃음 반 울음 반의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마음껏 웃기 시작했다. 


“뭐,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요. 우산보다는 명태에 집중했거든요. 명태가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그때 나는 율의 진심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율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일이 아닌가.

한참이나 지나서 웃음을 지우고 난 밍이 평소의 목소리를 찾아 말했다. 


“중요한 얘기 하셨어요. 율이 맞아요. 보이는 대로 그리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가 본 대로 그리는 거니까요. 본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은 아니죠. 심안이라고 마음으로 보는 눈이 있다고 하잖아요. 율의 명태가 웃고 있다면 그건 웃는 겁니다. 맞아요.”

그러자 조용히 있던 참이 예의 야무진 소리로 물었다. 


“그렇지만, 밍. 우리는 지금 배우는 과정인데 마음대로 그린다면 아이들 그림과 뭐가 다를까요? 저는 필요한 부분은 짚어주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율의 그림은 동화적이지만 과연 율이 의도한 것일까요?”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율과 참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고 얇은 유리처럼 바스러졌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우리가 입시를 보는 것도 아니고, 프로가 될 것도 아닌데.”

머리 벗어진 50대 남자가 엉거주춤 끼어들었다. 


“영 선생님, 그건 아니죠. 아마추어는 영원히 아마추어인가요? 프로의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요?”

참은 지지 않고 덧붙였다. 영이라고 불린 남자와 율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의 눈빛으로 참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불꽃을 끌 사람은 밍밖에 없어 보였고 난 밍이 얼른 나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막상 나선 사람은 수였다. 


“우리가 지금 감상을 하나요? 평가를 하나요? 사물을 그리는 건가요? 마음을 그리는 건가요? 그림을 즐기고 있나요 트레이닝을 하고 있나요? 각자 생각이 다를 테니 오늘은 그만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의 말은 어떻게 보면 화를 낼만한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워낙 부드럽고 낮게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적대감 없이 그의 말에 호응했다.

 

“수 선생님, 고마워요. 제 생각도 그래요. 그림은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사실을 묘사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진이라는 예술이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한 장의 도화지 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테크닉이 따라가면 좋겠지만 그것도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벌써 석 달의 시간이 지났고 여러분은 과제를 비롯해서 이미 수백 장의 그림을 그려 왔어요. 수채화에서 저의 기술적 가르침은 끝났다는 얘기예요. 여기까지 하죠.”

밍의 말에 참은 자신의 그림을 들고 제일 먼저 미술실을 나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짐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아동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게 그 사람 한계라는 거네요.”

율의 시무룩한 말에 사람들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누구도 누구를 위로해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율은 자신의 방식을 따른 거예요. 장담하건대 율은 어떤 그림을 그려도 동화적일 겁니다. 그게 율이니까요.”

밍의 말에 사람들은 마침내 위로를 받았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참과 싱, 그리고 젠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율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명태가 웃고 있지 않을 뿐이지 눈알이 졸거나 아예 형태가 없었고 지느러미가 지나치게 작거나 혹은 너무 커서 날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파란 비닐우산은 비닐이 아닌 폴리에스테르 100% 천으로 만든 불투명 우산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후 수가 다시 들어와 남아있는 밍과 율에게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야망이 크다 보면 마음이 좁아지는 걸까요.”

밍의 중얼거림이 어둑해지는 하늘에 묻히고, 셋은 사이좋게 미술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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