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3 - 유랑의 시작
드디어 미술실에 문제가 생겼다. 학교마다 경비업체를 통해 경비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세콤이 작동되니까 미술실도 비워야겠어.”
그림 그리는 선생들을 눈엣가시처럼 싫어하던 교감이 기회라는 듯 밍을 불러 말했다.
“우리가 나가야 하는 건 맞지만 왜 그렇게 우릴 싫어할까?”
대머리 영이 툴툴거렸다. 그는 이 모임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본래 난을 쳤었다고 가끔 잘난 척을 했었다. 서양화와 동양화는 격이 다르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은 그가 다시 매난국죽에 빠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싫은 거죠 뭐. 그림 때문에 학교일을 등한히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교감과 대판 싸운 적이 있었던 율은 차라리 시원하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이야기가 나오기에 제가 요 앞에 미술 학원을 알아봤어요. 그런데 학원이 우리를 다 수용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참이 그녀답게 대안을 제시했다. 이미 사람들의 이탈은 시작되어서 열댓 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에도 옹색한 자그마한 학원이었다.
“입시 학원이 아니라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쓸 수 있는 게 다행이에요. 이젤도 준비되어 있고. 그런데 팔레트나 붓 같은 것들은 각자 들고 다니셔야 해요. 우리 것까지 수납할 공간이 없어요. 물통이야 포개놓으면 되고 합판은 얇으니까 한쪽에 모아놓기로 하지요.”
밍의 설명에 동의한 사람들은 어쨌든 미술학원에서 모였다.
그들이 처음 한 일은 나무시계인 나를 미술학원 벽에 걸은 것이었다. 학원에는 벽시계가 없어서 내가 유용했다. 벽에 걸린 나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학원은 비좁아서 불편했다. 결국은 한 달을 못 버티고 몇 사람이 또 빠져나갔다.
“전시회 하려고 해요. 그동안 그린 그림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좀 더 박차를 가하면 좋겠어요.”
밍의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의 만족한 웃음을 보는 순간 생각을 바꿨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전시회라뇨? 너무 빠르지 않나요? 우리 그림이 너무......”
“아뇨, 마땅한 때라는 건 없어요. 그림을 거는 때가 마땅한 때입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렇게 열심히 그려왔는데 내보일만한 거죠.”
밍의 말은 사람들의 사기를 하늘 꼭대기로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이 집단은 시작부터 전시회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밍의 이야기가 그들의 표출욕구 버튼을 눌러버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밍, 내 그림도 거나요?”
율이 자신 없는 말투로 묻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밍을 주시했다.
“당연하죠, 율! 무슨 말이 그래요? 다 할 거예요. 액자도 해야 하고 전시장도 잡아야 하니까 경비는 좀 들지만 해야죠.”
밍은 어느 때보다 말이 까칠했다. 말투만 부드러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밍이니까 일을 추진한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서 하나요? 우리에게 대관을 해 줄까요?”
“인사동에서 합니다. 그렇게 아시고 더 열심히들 하세요.”
사람들은 서로 쑥덕거렸다. 당시만 해도 전시회는 인사동이 대세였다. 그들은 작가들의 전시회를 보거나 혹은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인사동에 간 적은 있어도 자신의 그림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들에게 인사동이란 너무 잘 아는 곳이면서 낯선 곳이었다.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도 않은 전시회를 앞둔 사람들은 밍이 내주는 과제를 미친 듯이 하느라 잠도 못 잔다고 했다. 미술학원은 평소에는 쓸 수 없었기에 과제는 각자 집에서 해오는 수밖에 없었다. 참이나 싱, 젠의 경우는 일주일에 7장의 그림을 그려오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싸우기도 하고 애들을 피해 방문을 잠그고 그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남편이 화가 나서 그림을 집어치우라고도 했고 대머리 영의 아내는 남편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쟁터의 군사들 같았다. 얼마나 치열하게 과제를 해 내고 평가받고 또다시 그리고를 반복하는지 얘기를 듣는 내가 지칠 지경이었다. 전시회 선언 이후 미술학원은 말 그대로 열기가 넘쳐 폭발할 지경이었다. 가끔 미술학원의 원장이 밍과 모종의 대화를 하긴 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근처의 중학교 선생들이 미술학원을 단체로 드나든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그들에게 미술학원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장소 이외의 어떤 의미나 흥미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소일거리로 다니는 이 미술학원에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 같은 데를 나가려고 지도받는 고학년 애들이 몇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밍이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 심사위원을 맡은 게 화근이었다.
“작업실이 없으니 당하는 설움이죠. 복권이라도 사서 작업실 한 칸 마련하죠?”
밍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얼굴이 황갈색으로 보였다. 마치 간에 문제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참 별 일이 다 생기네요. 예술이 이렇게 나를 피해 갈 줄은 몰랐어요.”
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으나 사람들은 잠잠했다. 내가 보기엔 누구도 자신이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시회의 열기에 찬물이 끼얹힌 상황에 사람들은 조용히 수선거렸다. 밍이 황갈색 얼굴로 작은 눈을 굴리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대머리 영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우리 아들이 요 앞 건물 지하상가로 입점했는데 아직 2층은 공실이더라고. 유리창만 붙어 있어. 전시회 때까지 잠깐은 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화장실 같은 게 없긴 해. 아직.”
영의 말에 사람들은 그를 주목했다. 그의 대머리가 빛나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정말이요? 영어 선생님, 한 번 알아봐 주세요. 화장실이야 지하철 화장실도 있고 근처 카페 화장실 좀 빌려야죠. 뭐.”
참이 적극적으로 대머리 영에게 부탁하자 사람들도 마지못해 호응했다.
결국 수와 영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나갔고 수선스런 분위기는 붓을 들지 못하게 했다.
“오늘은 전시회 이야기 좀 하고 마치죠. 다음 주에 마음에 드는 그림 석 점씩 가져오세요. 선택 장애 있으신 분들은 다섯 점 정도 골라 오시고요. 제가 생각해 둔 갤러리가 크진 않지만 좀 간격을 좁히면 이십여 점은 걸 수 있을 거예요.”
밍의 이야기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그나마 미술학원을 편히 임대해 썼는데 갑자기 나가야 하는 상황이 마뜩잖았다. 왜 밍은 심사위원을 해서 이 사달을 만드는가 하는 푸념이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내가 알기엔 영어 선생님 아들이 호프집을 한다지 아마? 없는 돈 여기저기서 끌어서 차려준 모양이더라고. 연금 대출도 받은 것 같아.”
“그 아들이 말아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던데요? 그런데 또 돈을 줘? 아휴 답답하다.”
사람들의 수런거림 속에 안경 쓴 남자가 별 일 아니라고 했다. 경상도 억양이 심한 역사 선생이었다. 자기가 한 번 가봤는데 음식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서 또 망할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그 위의 공실과 음식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화장실만 상관있겠죠. 화장실은 거길 써야 하는데 맥주 값 꽤나 나가겠어요.”
“맥주 마시고 화장실 가고, 화장실 가고 맥주 마시다 보면 그림 그릴 일은 없겠는데요?”
마치 좋은 건물에라도 입점하는 양 달뜬 사람들의 잡담이 무르익어갈 무렵 수와 영이 돌아왔다.
수는 멀쩡한 얼굴인 반면 영은 불그레해서 분명히 맥주 한 잔 걸치고 왔다는 표시를 내고 있었다.
“마침 건물주와 연락이 됐는데 그냥 쓰라네요. 아직 공사 중이라 안전은 보장 못한다고.”
잘생긴 수가 붉어진 영을 대신해서 말했다.
“어떤 상태인데요?”
참이 꼬치꼬치 물을 태세로 질문에 돌입했다.
“건물은 건물인데 바닥이 아직 시멘트고 격벽을 치지 않아서 운동장처럼 횅댕그렁하지.”
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사실 공중에 달린 빈 시멘트 상자인데 괜찮겠냐는 완곡한 질문을 포함했음에도 사람들은 그다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수의 말투가 가진 편안함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은요? 물은 어디서 가져오고 버려요? 화장실이 없다며?”
“싱크대는 있더라고.”
“같이 한 번 가 보죠. 가깝잖아요?”
밍이 단번에 결정했다.
사람들은 주섬주섬 물동이를 비우고 그 속에 붓과 물감, 팔레트를 집어넣었다. 오늘 그리려고 준비한 아르쉬라는 고급 종이도 드르르 말아 집어넣었다.
율은 잊지 않고 나를 못에서 꺼내달라고 국일에게 부탁했다. 국일이 가볍게 나를 내려 율에게 주자 율은 헝겊으로 된 커다란 가방에 나를 집어넣었다. 율의 걸음 리듬에 맞춰 어둠 속에서 덜그럭거리며 잠시 후에 도착한 곳은 시멘트 벌판이었다.
맙소사. 영은 어떻게 이런 곳을 얘기했을까. 그리고 이런 곳을 와 보자고 하는 이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내가 혼돈 속에서 까물까물할 때 밍의 소리가 카랑카랑 들려왔다.
“일단 한 달만 해 보죠. 추운 때는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8월이 당연히 춥지는 않지만 에어컨도 선풍기도 하다못해 바람도 없는 이곳에서 한 달을 지내다니.
그러나 사람들은 다음에 신문지를 가져와서 깔고 일단 개인 의자와 이젤을 준비하면 되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프로도 아닌 초짜 아마추어들이 더위를 먹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래도 출입문은 있으니 다행이네. 누가 우리 이젤이나 더러워진 물통을 들고 가진 않을 테니까. 미술학원에선 유목민이었는데 그래도 여긴 정착민 버전? 좋아요. 새로운 경험.”
율이 나를 꺼내 창문턱에 놓으며 소리쳤다.
“시계는 누가 탐낼 것 같은데?”
젠이 툭 나서서 마치 자신이 가져갈 것처럼 말했다.
“갈 때는 창 턱 밑에 감춰두고 가면 돼요.”
율이 한 말에 나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법 몸무게가 나가는 나를 들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시멘트 벌판살림은 전시회를 앞두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화장실 때문에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을 지하까지 오르내리는 일은 아직 젊은 그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물의 내부공사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에 가을의 끝 무렵까지 그곳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영의 아들이 두 달 만에 호프집을 닫아서 지하철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