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6- 궐(闕)
유화를 시작한 사람들은 2년 만에 전시회를 했다. 여전히 춥고 눈이 날리는 겨울이었고 밍의 고집으로 장소 또한 인사동이었다. 갤러리는 같은 곳이 아니었지만 규모는 거의 비슷했다. 이번 유화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여섯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제목은 ‘6인 6색’이었다. 대머리 영의 예언대로 이러다가 ‘2인 2색’까지 가는 일은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의 그림은 자신들이 그리던 수채화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다만 물감의 무게가 느껴지는 캔버스가 중후한 맛을 내서 뭔가 좀 더 예술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단순히 나의 생각이지만.
“사막을 그리던 선생님은 왜 빠지셨어요?”
수채화 전시회에서 수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그 젊은 여자였다. 그때보다는 좀 더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소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왔던 남자는 없었다. 나도 수에 대해서는 궁금했기에 귀를 쫑긋하며 밍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예. 해외 연수 가셨어요. 아니, 유학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외국에 계셔요.”
그때서야 나도 왜 수가 계속 안 보였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작업실에서는 수에 대한 무수한 추측이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았다. 누구는 싱가포르에 파견 나갔다고 했고 누구는 미국에 유학을 갔다고 했다. 또 누구는 몸이 아파서 휴직을 신청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중 누구도 교육청에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수는 다른 학교로 전출된 상황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나만큼 수에 대해 관심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관심 있는 나는 수에 대해 무엇 하나 알아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선생님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요. 뭐가 좋으셨어요?”
살갑고 친절한 밍의 언어를 듣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자는 뭔가 수줍어하면서 율의 그림을 가리켰다. 어린 조카 둘의 모습을 그린 인물화였다.
“그건...... 저 그림 그린 분이 저분인가요?”
여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한 채 손끝으로 율을 가리켰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율은 무슨 이야기인지를 하며 신나게 웃고 있었다. 전시회 때만 예쁜 옷을 입는 율은 이번에도 흰색털이 겉으로 나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눈에 띄었다. 겉으로 나와 있는 털 때문에 율은 훨씬 뚱뚱하게 보였지만 눈사람처럼 귀엽기도 했다. 그런데 신발이 빨간색 앵클부츠여서 어찌 보면 거위 같기도 했다. 내게 있어서 거위는 어떤 기억 속의 품위 있는 새였기에 거위 같다는 말은 듣기엔 거북해도 칭찬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어디에서인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님, 작가님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분이 있는데 혹시 파실 수 있나요?”
여자는 밍의 손에 이끌려 율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사람 같기도 하고 거위 같기도 한 율이 길고 가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바라봤다.
“작가는 무슨.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나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율은 자신의 작품이 있는 곳을 눈으로 훑었다.
“어떤 그림이요? 저 인물이요?”
율이 출품한 석 점은 인물화였고 모두 다 어린아이들이었다. 여섯 명중 누구도 인물화를 걸진 않았기에 율의 그림은 도드라졌다.
여자는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율의 표정을 살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는 그림을 팔지는 않고, 드릴 수는 있어서요.”
옆에 섰던 밍이 율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산다는 사람이 있으면 팔아야지 무슨 소리야 하는 동작이었다.
“일단 그림이 아직 제 마음에도 흡족하지 않아서 창피한 것도 있고요, 나중에 후회가 되면 어떻게 할 수도 없어서 그래요.”
율이 밍의 촘촘한 레이더를 벗어나 여자에게 확신에 찬 소리를 하는 것이 멋져 보였다. 여자는 율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나를 가리켰다.
“저 시계 만든 목수 오빠가 작가님 그림을 좋아해요. 지난번 첫 전시회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다녀가셨는데 작가님 안 계실 때였나 봐요. 저에게 부탁했거든요. 알아봐 달라고.”
나는 여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나를 만든 목수의 동생이라고? 전혀 안 닮았는데?
나의 궁금증과 달리 율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렇다고 선한 표정의 소녀 같은 그 여자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율은 마음이 너무나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제 그림일까요? 다른 작품들 좋은 거 많은데?”
율의 질문은 가난했고 빈약했다. 평소의 율과는 너무 달랐다.
“그냥 작가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좋대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된다고 했던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율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목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선물할 수도 있다니까 잘 얘기해 보세요.”
밍이 의미 있게 웃으며 그들의 옆을 스쳐 방명록 등이 비치된 테이블로 갔다. 목수의 방문 기록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전시가 모레까지니까 일단 마치고 생각해 볼게요. 주소 남겨주세요. 물론 꼭 보내드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웃음이 피어났다. 웃는 여자는 더욱 소녀 같았다. 그리고 유치원아이처럼 배꼽인사를 서너 번이나 하고는 전시회장을 빠져나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밍이 율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동생은 수 선배 그림이 맘에 들고 오빠는 율의 그림이 좋다니 둘이 참 많이 다르네. 아니, 뭔가 통하는 게 있나? 수 선배와 율의 그림이? 거 참 신기하다.”
밍이 혼잣말로 떠들었다. 전시회장은 몇 사람의 방문객이 들어왔다 나가고 또 들어오곤 해서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밍,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수는 어디 있나요? 밍은 알죠?”
율이 소털 색 스웨터를 걸치며 물었다. 실내이긴 해도 저녁이 되자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
“나도 몰라. 소문만 들었는데 어느 것도 수와 어울리는 소문이 아니거든. 하여간 다시 돌아오면 그때 물어보지 뭐. 굳이 사모님 병원까지 가서 묻기도 뭐 하고. 아마 별일은 아닐 거야. 별일 같은 것과는 관계없는 사람이 수 선배니까.”
밍은 아무런 표정 없이 글을 읽듯 말했다. 밍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감할 준비를 했다. 오늘은 율이 전시장 당번이었지만 밍이 들렀던 터라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근처 음식점을 머릿속으로 검색했다.
전시장 덧문을 막 닫으려고 할 때 한 여자가 들어섰다. 은회색의 긴 모피코트를 입고 머리를 쪽진 모양으로 단정히 말아 올린 여자는 첫눈에도 고급스러웠다. 그 고급스러움이 천만 원이나 한다는 모피코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율이나 밍은 알아차렸다. 그러나 환경주의자이기도 한 율의 눈매는 실룩였다.
“도대체 몇 마리의 밍크를 죽여서 몸에 걸친 거야. 아니 은여우인가? 하여간 남의 가죽을 제 가죽인양 입고 다니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어.”
밍에게만 들리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건만 알아듣기라도 한 듯 여자가 밍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여섯 분만 참여하셨네요. 의외의 분들이 빠지시고.”
“누굴 말씀하시는지.”
밍의 질문에 여자는 수와 젠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분명한 설명을 했다. 여자가 수나 젠을 이름으로 알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모네 화풍의 풍경화 그리시던 분과 사막인지 벌판인지 그리시던 분이요.”
말하는 것으로 보아 첫 번째 전시회도 왔었던 모양인데 내 기억엔 없는 여자였다. 이 독특한 매력의 아름다운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기는 밍이나 율도 마찬가지였다.
“아, 지난번 전시회도 오셨었던 모양이죠? 그 두 분을 기억하는 걸 보니?”
밍의 질문은 굉장히 건조했다. 와 주셔서 고맙다는 기미는 전혀 없이 왜 왔지? 하는 느낌의 어투였다.
여자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전시장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봤다.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타고 내려온 높은 굽의 구두는 큐빅이 화려하게 장식된 금빛이었다. 어떻게 봐도 이 아마추어 전시회장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격조 높은 파티에서 방금 들어온 듯한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여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밍이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율의 귀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뭐예요? 아는 사람 맞죠? 난 처음 보는데?”
웃음 띈 얼굴로 목례를 하며 나가는 여자가 오늘의 마지막 방문자였다.
“고저스! 이 단어가 딱 어울리는 여자네요. 뭔가 여기와는 좀 어긋난 분위기지만.”
율이 감탄하며 전시회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저스는 무슨. 율, 네가 더 멋져.”
밍의 소리에는 잔뜩 불만이 담겨 있었다. 여자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무슨 소리예요? 친구들이 거위 같다고 놀렸어요. 내일은 솜바지 입고 올 거예요.”
율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율을 거위 같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내일도 오려고?”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이 분위기를 맘껏 누리고 싶어서요. 내일은 싱 담당이니까 노래도 좀 듣고요.”
기분이 괜찮은 율과 달리 밍은 묘한 얼굴인 것이 아마도 그 여자를 반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기억을 자꾸 뒤지는 듯한 밍의 표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젠이 걱정이에요. 괜찮아야 할 텐데.”
“그러게.”
때는 1998년이었고 IMF로 인해 하루에 도산하는 기업이 부지기수라는 뉴스가 날마다 양산되는 시점이었다. 아, 젠의 남편이 사업가라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그래서 젠은 몇 달간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나도 갑자기 젠의 걱정으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피곤한 듯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던 젠의 모습과 다정한 오빠 같던 젠의 남편이 오버랩되었다.
“퇴직한다는 얘긴 있었는데, 정리가 되면 그래도 그림은 계속할 거야.”
힘없는 밍의 소리에 율이 덩달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밍과 율이 나가고 전시회장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젠이 어디에서라도 쪽잠 아닌 편한 잠을 자고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빨리 돌아와서 이 작업실에서 휴지를 베고 차라리 쪽잠 자는 젠이 보고 싶었다.
수보다 젠에게 더 마음이 쓰인 오늘, 평소에는 거의 들리지 않는 나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