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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Oct 02. 2024

6755호실 (14)

기억 7-운명과 선물

말로만 듣던 세기말이란 것을 나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경험이 나에게 특별한 무엇을 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그 시점을 별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기가 되려면 또 100년이 지나야 하므로 내가 경험하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세기말인 것이다. 세상은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듯 소란스러웠으나 별일 없이 평소의 연말과 비슷한 정도의 소음 속에 2000년이 시작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글자를 쓰는 데 불편함을 좀 느끼는 것 같았다. 1999와 2000은 터무니없이 다른 글자의 조합이므로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적응했고 1900년대였던 20세기는 마치 없었던 듯 ‘서기 2000년’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조용한 소동 가운데서 다행인지 우리 작업실의 사람들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세기가 바뀌는 때가 겨울 방학이기도 했고 다들 공무원인지라 IMF의 여파도 없었다. 젠을 제외하곤.

      

젠은 힘들었다. 아니 힘들어한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퇴직한다고 하더니 정말 신청했더라고.”

젠과 한 학교에 남아 있던 싱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싱의 말은 침묵에 묻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 듯 조용했다. 2층의 작업실은 석유스토브로 인해 유리에 하얗게 성에가 끼었다. 단열유리가 아닌 유리창은 바깥의 추위를 견뎌내기 어려웠다. 율이 유리창 위의 성에를 나이프로 긁었다.


<21세기>

율만 새로운 세기를 기념하는가? 나는 짧고 통통한 율의 손가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도 율의 유리창에 집중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에 글씨는 녹아내렸다.

  

바쁜 연말과 연초를 보내고 처음 모인 21세기의 작업실에는 수와 젠만 없었다. 대신 오랜만에 작업실로 돌아온 국이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제법 살아나면서 침묵이 스러졌다. 


“국일이 제일 좋아하는 눈치네. 하긴 단짝이었으니...... 섬마을에서 점수는 꽉 채워온 거지?” 

밍이 국이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국이가 승진을 위해 섬으로 들어간다는 얘길 몇 년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나도 궁금했다. 이젠 정말 섬으로 갈 일이 없으려나? 국이는 섬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3년이나 그곳에서 지내고 온 것을 보면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니, 점수는 차치하고 병만 얻어 온 것 같아. 바다하고 나하고 안 맞는다는 느낌이랄까? 뭐 하여간 많이 아팠어. 병원도 없는데서.”

국이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말라 있었다. 워낙 몸피가 작고 피부도 창백해서 병약해 보이긴 했으나 제법 강단이 있었는데 그 강단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부서질 것 같은 속이 빈 설탕 인형 같았다. 


“웬일이래? 하여간 건강부터 챙겨야지. 육지로 들어왔으니 살 좀 찌우시고. 국이 유화 재료는 참이 싣고 올 거야. 어차피 국이는 처음부터 해야 하니까. 수 선배도 지금쯤 오면 좋겠는데. 뭐, 알 수 없지.”

밍의 입에서 수가 발음되자 사람들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되었다. 


“수는 어디 있는 거야? 다시 복직했다는 말도 있긴 한데.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여길 오지도 않고.”


“복직을 했다면 했을 것이고, 여길 올 마음이 있으면 오겠지. 우리 신경 끄자고. 알아서 할 사람이니까.”

사람들의 입을 열었던 밍이 단숨에 다시 그들의 입을 닫아 버렸다. 


“젠은?”

국이가 싱을 향해 물었다. 


“거의 일 년을 버티다가 작년 10월쯤 파산인가 면책인가 뭐 그런 거 한다고 하더라고, 남편이. 젠이 많이 힘들었지. 아마 퇴직금도 정산해서 남편 회사 직원들한테 일부 지급한다는 것 같아. 경력이 10년이니 퇴직금이 얼마나 되겠어? 그래도 나 몰라라 하고 뒤집어지는 업자들하고는 확실히 달라도 달라. 아마 젠 남편은 재기할 거야.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고. 젠도 일이 수습되면 다시 작업실에 올 거야.” 

싱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국이는 젠의 먼지 탄 캔버스를 가리켰다. 유화를 시작하고 세 번째 그림인 것으로 기억되는 풍경화였다. 


“젠 그림 참 좋다. 자유로운 영혼. 딱 그 느낌이네. 색을 참 다양하게 잘 써.”

국이가 감탄사를 연발하자 밍이 구석에서 젠의 사과 그림을 꺼내왔다. 짙은 감색의 물감이 부분적으로 여기저기 칠해진 마치 썩은 것 같은 사과. 나도 그 그림이 기억났다. 


“뭐야 이건?” 

싱이 굳이 왜 사과 그림을 꺼내느냐는 듯 밍을 향해 날 선 소리로 물었다. 


“아니, 이 그림을 설명하려고. 국이는 처음이기도 하니까. 이게 젠의 첫 유화작품인데 어때?”

밍이 그림의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림을 본 국이의 표정은 의아함이었고 함께 있던 사람들도 매우 표현하기가 난감한 그러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외면하긴 어려운 그런 표정들이었다. 모두들 잠깐 침묵하는 사이에 참이 자기 몸뚱이만 한 짙은 밤색 캔버스 백을 끌고 들어섰다. 


“어머, 선생님, 아니 국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제 승진하시는 거예요?”

참은 들어서자마자 백을 팽개치듯 밀어놓고 국이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 참을 바라보는 밍의 표정이 씁쓸했다. 


“승진은 다음 일이고, 물건이나 꺼내죠. 국이가 궁금해하니까.”

국일이 참에게 재촉하고 사람들도 동조했다. 참의 입 꼬리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분위기 왜 이래? 


“아니, 우선 이 그림부터 이야기하죠. 이왕 젠 얘기가 나왔으니까.”

밍이 젠의 사과 그림을 이젤에 올려놓았다. 마치 경매장에 나온 그림처럼 젠의 사과는 특별해 보였다. 


“썩은 걸까? 화폭에선 그런 느낌인데 그렇다고 썩었다고 하기엔 속이 멀쩡할 것 같고.”

국이가 보이는 대로 말한다면서 쑥스러워했다.

 

“색깔이 온통 중첩되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섞어서 검정에 가까워졌나?”

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밍이 젠의 다른 캔버스를 꺼내 들고 왔다. 그들의 두 번째 그림인 해바라기가 꽂힌 화병이었다. 


“이건 어때요? 우리 다 그림 그리고 나서 감상평을 한 작품이잖아요? 뭘 처음 보는 것처럼 그렇게 조심스러우실까? 그냥 얘기해 봐요. 국이를 위해서. 마침 젠이 없으니 상처받지도 않을 거고. 여기 있는 사람 그림으로 얘기하면 막 미워하고 그럴까 봐.”

밍의 농담 섞인 말에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젠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했을 테지만. 


“사과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아? 고흐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비슷한 정도의 강렬한 색을 쓰고 있잖아. 아니다. 강렬한 것은 사과와 비슷하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싱이 웃자고 한 말이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정말 태양이 내려와 앉은 느낌? 뜨거운 태양 말고 따스한 태양. 그런데 바닥에 있는 저 분홍색은 작은 면적인데 굉장히 눈에 띄네. 굳이 저 색을 쓴 이유가 있을까?”

국이가 화병이 놓인 테이블에 칠해진 분홍색을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테이블은 녹색과 노랑과 푸른색, 갈색이 뒤섞여 있었는데 기타의 피크만 한 삼각형 부분만 환한 핑크였다.

 

“퀴나크리돈 오페라. 제가 바람난 색이라고 그때도 알려드렸는데. 예쁘죠?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나.”

국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발음을 따라 하려다 포기했다. 


“그냥 오페라라고 해. 수채화에도 있었던 그 색.”

밍이 슬쩍 웃으며 발음에 실패한 국이를 구해줬다. 


“저 색을 쓴 사람이 젠 밖에 없었다는 걸 얘기하려고 해요. 그렇잖아요? 다들 그때 해바라기 그리면서 오페라 쓴 사람 있어요? 옐로, 샙그린, 기껏해야 블루정도? 왜들 그렇게 샙그린만 좋아하는지 몰라. 그런데 젠 그림 봐요. 빌리디안이 부분적으로 섞였어. 하물며 오페라까지. 그렇다고 촌스러운 건 아니잖아요? 그게 젠이에요.”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데 밍?”

국이가 얼빠진 사람처럼 밍을 보다가 그림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사이에 참은 국이의 그림 도구를 꺼내서 정리하고 있었다. 


“너무 겁주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해 줘. 그렇잖아도 직전 섬마을 선생님 넋이 나가려고 하네.”

싱이 밍을 채근했다. 그러나 밍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율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밍 외에 몇 사람의 커피 주문을 받고 율은 전기 포트에 전기를 넣고 봉지 커피를 뜯어 각자의 잔에 쏟았다. 잠시 후면 달달한 커피 향이 이 작업실을 채울 것이다. 

역시 커피가 한 순배 돌아가고 나자 공기는 훨씬 따스해졌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져서 답답함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창문 열고 환기하기엔 쉽지 않은 추위였다.

 

“새천년은 겨울도 새롭게 추운가 봐.”

율이 커피의 마지막 모금을 홀짝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천년은 무슨.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그날이 그날이지.”

싱이 시큰둥하게 받았다.


“그런 노인네 같은 소리는 오십 년 후에 하시고. 자, 다시 젠으로 갈까?”

밍은 커피잔을 든 채로 다시 젠의 그림 옆에 비스듬히 섰다. 밍의 그런 모습은 매우 낯익으면서도 멋지고 카리스마 넘쳐서 난 그런 밍의 자세를 좋아했다. 


“더 할 얘기 없음.”

싱이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고 사람들은 웃음으로 밍을 재촉했다.


“알았어요. 우리가 젠을 걱정했잖아. 아니, 지금도 걱정이 되지. 이제 2월이면 젠은 학교를 영 떠날 테니까. 우리 중 누구도 아직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진 않았지. 젠이 최초의 모험을 한다고 생각해 나는. 사실 학교라는 곳은 안전한 곳이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머리 영이 지난해에 명예퇴직을 했지만 그는 작업실을 먼저 떠난 사람이었기에 경우가 달랐다. 그리고 대머리 영은 25년을 채워서 연금수령도 가능했다. 그러나 젠은 그렇지 않아서 사람들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나도 젠이 너무 걱정되었다. 늘 부유함과 넉넉함이 넘쳤던 젠이 겪는 인생의 파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누가 언제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삶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고. 왜냐하면 젠은 색깔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 천부적으로 그래. 나도 부러워. 그리고 그림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내면은 당당하고 단단해. 나는 젠이 결국 다시 이 모임에 올 거라고 믿어. 장담할 수 있어. 젠도 약속을 했고. 다만 조건은 있지. 우리 모임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그런 조건. 지금이야 여섯 명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지. 그러니까 젠을 위해서도 수를 위해서도, 아니 우리를 위해서도 끊임없이 이 길을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물론 젠이나 수처럼, 또 국이처럼 형편상 몇 달 혹은 몇 년씩 건너뛸 수는 있어. 그런데 누군가가 남아 있다면 그 끈이 우리를 그림 그리게 할 거라고 믿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저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여긴 없을 거라고 생각해. 누가 가자고 부른 것도 아니고 끌려온 것도 아닌 세월이 7년째야. 이건 뭐지? 뭐라고 해야 마땅할까?”

밍의 질문 아닌 질문에 율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운명이지.” 

놀란 듯한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사람들은 와르르 웃었다. 


“운명이래. 율, 너나 운명이지.”

싱이 빙그레 웃으며 율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럼 뭐예요? 싱은?”


“선물이야. 프레젠트. 우리 삶에 더해진 엄청난 선물.”


“프레젠트라......”

율이 다시 손가락으로 흐려진 유리창에 ‘present’를 써 나갔다. 


후끈한 실내의 공기가 유리창에 물방울을 주르륵 흐르게 하자 율의 글씨는 금방 엉망이 되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에 놀라 벌어진 창틈을 커피의 잔향이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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