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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Oct 16. 2024

6755호실 (16)

기억 8-다시, 수

월드컵 개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해에 작업실은 또다시 이사를 했다. 아파트 단지 상가 2층에 있던 작업실에서 오피스텔을 거쳐 다섯 번째 이사였다. 사실 오피스텔은 밍과 그의 친구 화가가 임대한 것으로 토요일만 사용하는 공동 작업실이었다. 과거의 작업실들에 비해서 오피스텔은 깔끔했고 모든 것이 두루 갖춰졌지만 그만큼 조심스러웠고 불편했다. 결국 1년을 견디지 못하고 밍을 포함해서 그들은 다른 작업실을 찾았다. 

오래된 다세대들이 모여 있는 동네는 낡았지만 편안했다. 높은 건물이 없었고 1층은 거의 상가였기 때문에 작업실도 비어있는 1층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은 창문이 없는 창고였고 2층에 주인내외가 살고 있었다. 주인의 말로는 쌀장사를 하던 곳이었는데 그걸 접고 세로 내놓았다고 했다. 이번 이사는 여름이었는데 아주 낡은 스탠드형 에어컨이 있어서 모두들 기뻐했다. 


그들은 나를 출입문과 마주 보게 벽에 걸었다. 언제나 키 큰 국일이 내 담당이었다. 이사하던 날은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작업실에 창문은 없어도 출입문이 있는 벽 전체가 통유리였고 아랫부분에만 우윳빛 시트지가 발라져서 비교적 환했다. 혼자 있는 날이 많았던 나는 유리를 통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누구라도 오는 날이면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수가 오던 날 나는 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 그를 보면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수는 마치 어제도 왔었던 것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의자를 끌고 유리창을 향해 앉았다. 비가 오는 밖에서 들어왔음에도 그는 말끔했다. 차를 가지고 온 것일까. 수는 가만히 앉아서 비 오는 밖을 응시했다. 비 오는 걸 처음 보는 사람처럼 집중해서 보는 수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수를 보면서 사람이란 참 안 늙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가 창을 향해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분홍색 우산을 터는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보이더니 밍이 들어섰다. 밍은 짧은 치마에 민소매 차림이라 그다지 비에 젖을 일은 없어 보였으나 밍 자체가 젖어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치 혼자 비 맞은 듯 축 처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등장을 보면서 나는 잠깐 긴장했다. 둘이 무슨 일이지? 더욱이 수는 거의 칠 년 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수인사가 끝나기 전에 율이 들어섰다. 율이 밖에서 노란 양산의 빗물을 터는 모습이 보일 때부터 나는 안심했다. 적어도 밍과 수가 엮이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제한적이긴 하나 작업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작은 오해가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깨달음을 나도 모르게 얻게 된 까닭이었다. 


“국일과 국이는 오늘 뮤지컬 선약이 있고,  싱은 비가 와서 그런지 컨디션이 안 좋대요. 젠은 뭐 아직 베트남에 있으니 그렇고. 참은 시어머니 제사라네요. 저까지 셋인 것 같은데요.”

율은 점고하듯 줄줄이 상황을 읊었다. 


“그나저나 수 오빠 정말 오랜만이네요.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옷의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의자에 앉는 율은 마치 수가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선배 아마 칠 년 넘었을 걸?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요? 다들 걱정하다가 나중엔 잊어버렸지 뭐. 율 정도니까 기억하는 거야.”

밍이 축축한 머리카락을 올려 묶으며 농담처럼 얘기했다. 그녀는 머리를 감고 바로 온 것 같았다.


“말려야지 냄새나요. 그렇잖아도 숱 많은 사람이. 아유!”

율이 한쪽에 있던 선풍기의 단추를 눌렀다. 왜 그런지 모두 다 에어컨을 켤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습기는 있었지만 날씨는 제법 시원해서였을까. 아니면 에어컨이 없던 곳에서 지내다 보니 그 존재를 잊었나. 내가 더운 것은 아니었지만 제습이라도 시키지 싶은 생각에 갑갑했다. 


“그럴 필요 없어. 이거 다 빗물이야. 어차피 가서 씻어야 되니까. 바람 꺼라.”

밍의 알 수 없는 얘기에 수와 율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비 맞고 싸돌아다니다가 수 선배 약속이 생각나서 옷만 갈아입고 온 거야. 머리까지 감을 시간은 안 되고. 뭘 그렇게 이상하게 봐?” 


“살짝 미친 거 같아서. 왜 비를 맞아? 우산 두고?”

율의 질문은 수와 밍을 웃게 했다.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워서 이렇게 비 쏟아지는 날이면 나간 제정신 찾으러 돌아 댕기지. 사람 없는 곳으로. 괜한 오해는 무서우니까.” 


“무슨 소리야? 왜 무슨 일 있어요? 밍이 그러니까 무섭잖아.”

율은 말했고 수는 긴장했다. 그러나 밍은 천하태평이었다. 

밖에서는 비가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깐 소강상태인 것 같더니 다시 시커멓게 어두워지면서 굵은 빗줄기가 땅으로 꽂혔다. 


“와, 문 좀 열어놔. 이렇게 실내에서 땅으로 직접 내리는 비를 직관하기가 쉽지 않거든. 우린 항상 공중에 매달려 살았잖아. 율, 문 열어봐”

밍의 얘기에 율은 쪼르르 가서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정말 밍의 말대로 시원한 비릿함을 가진 비 냄새와 텁텁한 흙냄새가 사이좋게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그렇게 밖을 내다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뭔가 할 얘기가 있거나 묻고 싶은 얘기가 있을 텐데 비가 뭐라고 한참이나 보고 있는 모습이 난 신기했다. 


“선배 이젠 작업실에 올 생각인 거죠?”


“그러려고. 몸이 제법 괜찮아졌어. 복직하고도 한동안 힘들었는데 그나마 감사하네.”


“뭐야? 수 오빠 아팠던 거예요? 얼마나, 어디가?”

율의 쏟아지는 질문에 밍이 힐끔 바라봤다. 


“그러게. 선배한테는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정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괜찮은 건가? 걱정 돼서요.”

밍이 묶었던 머리를 다시 풀어 흔들며 묘한 이야기를 했다. 율은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으나 관여치 않기로 했다. 과거에 수와 밍이 선후배를 넘어선 특별히 친밀한 사이라는 둥 소문도 무성했었지만 그저 소문이었음을 율은 알고 있었다. 수는 밍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건강 문제는 필연적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마치 먼지처럼 오랫동안 떠돌았다. 율과 작업실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고 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렇게 수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칠 년간 유리됐다.

 

“국이는 건강이 안 좋다며? 섬 생활이 만만치 않았을 거야. 아무나 섬에서 사는 게 아니더라고.”

수는 마치 자신이 섬에라도 살았던 것처럼 말을 했지만 율과 밍은 대꾸하지 않았다. 국이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길 수는 어디서 들었을까? 작업실에 다시 오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하긴 밍이 전화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지인을 통해 알 수도 있는 일이긴 했으나 나는 궁금했다. 


“선배 유화 재료는 다음 주에 구해 올게요. 겨울에나 오시려나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랐어요. 재료와 도구는 참이 구해 올 겁니다. 국이도 기초는 시작했으니 선배는 그냥 어깨너머로 하세요. 기본은 제가 틈틈이 설명드릴게요.”

밍은 역시 밍이었다. 유화의 시작을 함께 하지 못한 수에게 확실한 커리큘럼을 제공하진 못하지만 책임지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밍을 율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고 수가 눈가의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그리고 밍을 향해 아주 부드럽게 말을 했다. 

 

“재료와 도구는 준비되었고, 유화 시작은 이미 했어. 한 2년 전부터. 다만 여기에 내 자리가 있을까 싶어서 미리 만나자고 한 것이고. 모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니까.”

수의 말을 들어보면 수가 밍이나 율이나 그 누구도 만난 일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미 유화는 시작했고 작업실 사용여부를 확인하러 왔다는 것이니.

밍의 표정이 뜨악했다. 이건 뭐지? 하는 질문이 얼굴에 매달려 있었고 율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누구한테?”

드디어 밍의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율도 얼굴을 들이대고 수를 관찰했다. 

  

“율, 문 좀 닫아줄래?”

밍의 갑작스러운 요구가 율을 자동인형처럼 튀어나가 문을 닫게 했다. 밍은 왜 저렇게 불쾌한 태도일까? 율도, 나도 궁금했다. 수가 어디서 그림을 배웠든 밍의 반응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당황한 것은 당연히 수였다. 그는 칭찬받을 줄 알았다가 혼난 학생 꼴이었다. 


“왜 그래? 문화센터지. 어디겠어?”

순간 작업실은 고요해졌다. 닫힌 문 덕분에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억센 빗소리만 순화되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밍이 얼굴을 감싸더니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 쪽팔려. 난, 또.”

영문을 알길 없는 율과 수가 무슨 소리냐며 밍을 다그쳤다. 


“난 선배가 혹시라도 하진이 화실에 갔나 했지. 선배네 동네 옆에 있잖아. 내 동기 문 하진, 그게 학교 때부터 얼마나 선배한테 꼬리 쳤어? 그래놓고도 모른 척 선배 와이프 병원에도 드나들고 말이지. 하여간 대단한 여우야. 걔한테 홀린 줄 알았지. 율, 문 다시 열자.”  

밍이 얼굴을 풀고 떠드는 바람에 수는 얼이 빠진 듯 있다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율도 갑자기 열이 나서 투덜거렸다.


“뭐야. 자기가 열지. 밍이 열어요. 나도 싫어!”

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밍이 벌떡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걸어가 문을 열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밍. 해괴하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을까. 난 그곳에 문 하진은커녕 화실이 있는지도 몰랐어. 알려줘서 고마워.”

수가 오랜만에 유쾌한 소리로 말을 해서 난 기분이 좋아졌지만 율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수 오빠는 스캔들이 몇 개야? 양파 같아요. 앞으로 양파라고 부를게요.”

율이 작심하고 하는 공격에 수는 다소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밍의 표정은 다시 평온해져서 언제 그렇게 수를 몰아붙였나는 듯했다.

 

“율, 그건 오해야. 스캔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뭐 없을 수는 없으나 몇 개는 아니라고. 하여간 일단 여기 다시 오게 되어 난 너무 좋아. 모두들 나를 다시 받아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연도 만들고 그림도 열심히 그릴게.”

밖에서는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종일이라도 올 것 같은 기세였다. 


“참 좋다. 비 와서.”

밍이 하품하듯 하는 소리가 알맹이 없는 도토리처럼 툭 떨어졌다. 


“선배는 왜 연을 만들어? 날리지도 않는 연을.”

꼭 수에게 답을 듣겠다는 의도가 하나도 실리지 않은 질문을 하고 밍은 일어서서 제대로 밖을 응시했다. 빗물에 젖었다는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번져 그녀의 민소매 옷을 적셨다. 짧은 치마 아래로 죽 내리 벋은 건강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수와 율보다 밍의 몸매는 한 수 위였다. 저렇게 멋진 몸매를 가진 밍이 오늘은 왜 비 내리는 거리를 쏘다녔을까. 누군가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집에 갈 때는 가져온 분홍색 우산을 쓰고 가겠지만 혹시라도 어디에서 또 비를 맞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차 가져왔으니까 오늘은 같이 가지. 비 오잖아.”

수가 둘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밍과 율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비 오잖아요. 비 오는 날은 빗속을 걸어야지.” 


“난 가다가 떡볶이를 먹을 거니까 괜찮아요. 비 오는 날은 떡볶이지.”

두 여자의 대답에 수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기 작업실 정말 좋다.”


내가 볼 땐 창고에 불과한 그 작업실을 좋아했던 그들은 주인이 소금 장사를 하겠다고 나가달라고 할 때까지 제법 오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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