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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pr 06. 2023

노년 매직

어느덧 내가 사랑했던 먹산은 저 산이 되어 버렸고 이곳 영장산의 일부가 이 산이 되었다. 

사람들이 왜 가까운 산의 고유한 이름 대신 지시 대명사를 써서 이 산, 저 산이라고 하는지 나이가 들면서 깨달아졌다. 


당연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나 뜻이 전해진다면 굳이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게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젊은이들이 줄여 말하기 하듯 노인들은 대명사를 사용하는 데 후자가 좀 더 세종대왕님과 가까운 쪽일 거란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다. 

    

어쨌든 이 산도 다니다 보니 거의 일정하게 만나게 되는 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보통 두 명 혹은 세 명, 많으면 네 명씩 다녔다. 


그중 세 명인 초로의 아줌마들은 같은 색깔의 같은 모양 모자를 쓰고 다녀서 ‘우리는 한 팀’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그녀들이 같은 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내가 알아보기에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누구나 알듯이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사람들은 다 닮아가므로 구별하기가 힘들어졌다. 


믿을 수 없지만 아주 노년의 경우 성별의 구분조차 희미해져 할아버진지 할머닌지 아리송할 때가 있었다. 한동안 어떤 할머니를 심술 맞은 할아버지로 착각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외출할 때 옷을 고르느라 노심초사하면 내가 하는 단골말은 ‘아무도 몰라요.’였다. 

물론 아무렇게나 입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 입었던 것을 오늘 또 입는다고 해서 상대가 알아보거나 또 입었다고 타박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노년으로 진입한 이래 아직까지 깨진 적이 없는 진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 닮아가는 중이었다.

      



“항암을 다섯 번만 한다더니, 무슨 다섯 번 더 해야 한다고 하네.”  

   

“나도 다섯 번으로 알았는데 왜 늘어난 거야? 아유, 젊은 애가 얼마나 맘이 그럴까?”  

    

내 또래의 여인 둘이서 나누는 대화였다. 

그녀들의 산행 걸음이 너무 느린 데다 길도 좁아서 뒤를 따라가다가 조금씩 얻어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중 한 여인의 딸인 듯했다. 

젊은 딸이 항암을 하고 있는데 사위는 도움이 안 된다는 둥.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딸이 암에 걸려서 고생을 하느냐는 둥. 

두 여인의 소리는 바람처럼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했지만 이야기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당신 잘못은 아니죠. 자책하지 맙시다.’  

   

그녀들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말하고 싶었으나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아는 대개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겪는 고통이나 불행이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병약하거나 아픈 자식의 경우에는 거의 100프로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죄를 짊어지더라도 아픈 아이의 고통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하는 완곡하고 슬픈 표현일 뿐. 

자식의 병 앞에서 속수무책인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차곡차곡 묶어서 신과 거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 산에서는 유독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렸다. 아마도 내 또래의 그만그만한 사람들은 결국 병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단 얘기일 것이다. 


암 치료에 맨발로 걷는 것이 좋다는 치료법에 따라 등산로 입구에 좋은 운동화를 나란히 벗어놓고 맨발로 산행을 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저 산에서도 상노인들의 맨발 산행은 있었는데 그곳은 치료라기보다는 건강증진의 방법이었다. 


나도 맨발로 한 번 도전해 볼까 생각은 했었지만 암치료자도 아니었고 건강증진을 시키고 싶지도 않았으니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등산용 운동화를 거의 운반하듯 신고 다녔다.   

    

정상에서는 보통 대여섯 명이 운동 기구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멀거니 앉아 있었다. 

나는 후자였는데 아침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이 땅에서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면 나는 새를 보고 새는 나를 보다가 새가 떠나가면 가져간 텀블러의 물을 마셨다. 


오늘도 늘 하던 대로 뚜껑을 열어 벤치에 놓고 물을 마시려는 찰나 텀블러 뚜껑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뚜껑의 하산을 구경했는데 주우러 갈 수 있는 경사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주저앉아 물을 마시는데 건너편 벤치의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에구 뚜껑을 잃어버렸으니 물병이 쓸데없이 되었네.’ 


그런 표정이었으나 아무 얘기는 없었다. 

그도 나처럼 뭔가를 산 아래로 굴려 보낸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해 보았다.  

     

‘너와도 이별이구나.’


남아 있는 텀블러의 몸통에는 아들과 관련된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텀블러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다 버려야 한다고 아들이 주장했지만 그것 하나는 남겨 놓았었다. 

이제 집에 텀블러는 하나도 없었다. 

     

벤치에 기대어 거북이처럼 햇살에 몸을 말리고 있는데 예의 같은 모자 3명이 올라오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마치 백설 공주의 난쟁이들 같았다. 

키가 작기도 했지만 모자를 쓴 모습이 너무 그림책의 난쟁이들과 닮아 보였던 것이다.   

        

“돈이 5천이 넘으면 세금이 붙는다잖아? 그러니까 차용증을 쓰고 빌려주라고. 애들한테 이자를 넣으라고 하면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5천으로 결혼을 해요? 그래도 1억은 해 줘야 전세방 얻는 데 보태지.”     


“나 아는 아줌마는 10억짜리 집도 주던데? 세금 안 냈대. 아들이 전세로 들어왔다던가?”     


그들의 주제는 결혼하는 아이에게 줄 결혼자금이었다. 

사실 그 문제는 나도 얼마 전에 겪었던 일이라서 흥미롭게 들렸다.  

    

“돈이 많아도 못 준다니까? 이게 무슨 법이야? 애들을 결혼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마 그중 하나는 제법 부자인 듯 흥분하는 말투에서도 그런 티가 풀풀 났다.  

    

“그냥 5천만 원만 주라는 거야. 그래야 공평하게 가난하지.”   

  

“거 참 묘하게 설득되네.”   

  

모두들 손뼉을 치며 까르륵 대고 웃어댔다. 

그 소리에 나무에서 내려오던 새들이 푸드덕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새들도 아줌마들은 무서워하는 듯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게 이 세상인데 그 정도로 뭘 그래. 아직 덜 살았어!”


아마도 가장 연장자인 누군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떠드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잃어버린 텀블러 뚜껑 생각에 가자미눈을 하고 산을 내려갔다.

혹시라도 어딘가 마른 관목 덤불에라도 걸려 있으면 기어서 가져올 심산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뚜껑은 보이지 않았고 뒤따라 내려오는 두 명의 할아버지를 기척으로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과 달리 별말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이 얘기를 한다 해도 할머니들의 얘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동안의 산행에서 터득하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얘기가 있었지만 흐름의 원류는 그 세대의 삶이었고 이야기의 유형별로 결론은 비슷했다. 

할아버지들은 산행 복장도 동네 마실 다닐 때와 별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주로 k2 원정대 같은 등산복이었다면 양복바지나 일상복 점퍼, 또는 위아래가 맞지 않는 트레이닝복 정도였다. 


그런데 고산등반대의 전문 장비를 장착한 할머니나 동네 노인정 다니는 할아버지의 모양새나 거의 비슷하게 보였다. 

산에서 할아버지의 의상이 아무렇지 않듯이 하산해서 동네에 들어선 할머니 K2 원정대의 장비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그 같고 그녀가 그녀 같았으며 그가 그녀 같기도 한 노년의 매직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나중에 모두 구별이 어려운 쌍둥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러나 비슷비슷해진 노인들은 다른 세대에 비해 큰 무리일 텐데 이를 어쩌나 하는 오지랖이 금방 웃음을 가뒀다. 

      

그렇게 우리는 공평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저 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산에서도. 


우리 이후의 세대 또한 그러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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