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은 나를 낮추는 건가요.
"이게 다 겸손을 몰라서 그래."
다사다난했던 2023년도에 들은 말 중에 꽤 기억에 남는 말이다. 2030이 결혼은 하지 않고 사치에 빠져있는 것도, 남녀 간 혐오가 판을 치는 것도,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대드는 것도(그리고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갑질하는 것도) 다 겸손을 몰라서 생긴 문제라는 것이다. 흔히 '금쪽이'라 불리는, 문제가 될 정도로 '나'밖에 모르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보며 한 일갈이다.
문맥상, 위의 '겸손'은 '교만'에 반대 의미를 가지는 미덕으로 이해가 되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이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중시하는 교육을 일찍이 해온 서구권 국가에서는 이미 '금쪽이 사태'를 겪은 지 오래다. 자존감(self-esteem)이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로 연결되며 과시욕이나, 남에 대한 비난, 이기심, 혹은 오히려 불안정한 자아로 이어졌다는 오래된 담론이 있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 팽배하던 우리 사회에서 자존감 교육을 본격 실시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따르면, 겸손은 나를 잊는 것이며, 나에 대한 어떠한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내가 가진 것들을 낮춰 평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이다. 이 책은 편지 형식의 소설로, 노련한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수습 중인 악마이자 자신의 조카 웜우드에게 보낸 편지를 가장했다.
이 책을 읽은 지가 10년이 지났는데, 그때는 이 대목을 읽고 겸손은 스스로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이해를 가지는 것이라 이해했는데, 이는 다시 읽어보니 책에서 말하는 바와 다르다. 책에서는 분명하게, '겸손은 스스로를 잊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나를 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듯 모를 듯 어렵지만, 그저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 정도로 이해할 따름이다. 부풀려진 나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쪼그라든 나를 추구하는 것 또한 겸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감히 나의 생각을 더해 정리하자면, 겸손은 어떤 모습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느껴지는 내 모습을 호불호 없이 인정하고, 나 보다 이웃, 진실, 진리, 올바름을 보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책의 내용을 좀 더 보고 자유롭게 떠오른 내용을 적어본다. 어떤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고, 그냥 떠오른 내용이다.
겸손은 또한, 행위(do)가 아닌 상태(be)이기 때문에, 겸손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겸손을 해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겸손을 해치는 대표적인 것은 나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겸손(humility)은 라틴어 흙(humus)을 어원으로 하여, 인간(human)과 어원이 같아 사람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땅, 낮음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는 신을 두려워하는(경외) 존재라는 뜻으로서, 신 앞의 낮은 존재로 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시점에서는, '신 앞의 낮은 자'는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이제 나에 대한 평가는 멈추면 좋겠다.
+ 어쩌면 '금쪽이'들의 언행이 한눈에 봐도 어딘가 '어색한' 것을 보면, 그들이 정말 잃은 건 겸손 인지도...
여러 복잡한 사회 문제들의 원인을 '겸손의 결여'로 엮어 일괄하는 것은 다소 거친 표현이다. 또, 한편으로는 성급하고 교만한 말이다. 하지만 크게 와닿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특히, 다들 작정하고 부리는 허세에 괜히 느껴지는 피로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형편에 맞지 않는 소비 생활을 목격할 때, 또 그런 소비에 열을 올리는 대화들에 둘러 쌓일 때 겪는 피로감. 모임이 끝나고 난 뒤 돌이켜보면 아무런 알맹이도 남지 않았을 때의 그 허무함. (이런 것들에 피로를 느끼는 것을 보면, 어쩌면 나부터 당장 '겸손 수양'이 부족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Pride makes us artifical, and humility makes us real.
겸손은 우리를 진실되게 한다.
토마스 머턴.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은 힘들고 불편한 일이고, 심지어 허무한 일이다. 그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저서 <셀피>를 통해, 영국인 작가 윌 스토는 높은 자아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특정 정치적 집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위대한 나' 혹은 '위대한 우리 아이'를 꿈꾸느라 부자연스러운 소비가 지속되는 이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을 부추기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