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기 위해 어떤 동물은 죽어야 한다.’ 식사는 이런 죄책감이 포함된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다. 어릴 때부터 멸치, 새우, 문어 같은 것들이 통째로 접시 위에 놓인 광경을 보면, 한때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바다를 헤엄쳤을 거란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고기는 손질된 채로 접했기에 생명체가 아니라 ‘음식’이라고 받아들이기도 쉬웠지만, 불판 위에서 고기 위로 고이는 피를 볼 때 문득 내가 먹는 것의 진짜 정체를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게 당연하며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건이 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동물권, 환경, 건강(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에는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등. 나 역시 동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내가 키우는 동물과 내가 먹는 동물이 다른지, 의문이 생겼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도 깨닫게 되면서, 먼저 채식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서 조금씩 확신이 들었고,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채식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채식하겠다’라는 결심이 되기까지는 거의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갑작스레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하고 덩어리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해산물, 그다음에는 우유나 달걀까지 차츰 끊어나갔다. 각 과정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이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고, 지혜롭게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아직 배울 것 투성이다. 열심히 배워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
아직 완벽하진 않다. 중요한 건 나를 괴롭혀오던 불편함이 비로소 사라졌다는 거다.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집으로 돌아가며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생각할 때, 하나의 음식보다는 재료의 이름을 떠올린다. 냉장고에 있는 호박, 시금치, 브로콜리를 먹어야지, 생각하면 자연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내가 무엇을 먹는지 관심을 기울였던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이렇게 비건을 최대한 지향하고는 있지만, 주변에 강요하지 않으며 육식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진 않는다. 고기나 해산물을 먹지 않으려 할 때부터 선택지가 줄어든다. 친구와 밥 먹기조차 불편해지니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탈피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을 공부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정답을 만드는 것. 그렇게 주도적으로 살고 싶다.
아래는 소소한 채식 이야기.
서울역 건강한식당. 채소의 가짓수도 많고 소스와 어우러진 맛이 환상적이다. 사장님이 친절하기까지 하셔서 삼박자가 완벽하니 꼭 추천하고 싶다.
매일 채식 식당 검색하느라 힘들었는데 이 애플리케이션을 깐 뒤로는 걱정이 없다.
버려질 위기에 처한 못난이 농산물을 배송해주는 서비스, 어글리어스. (역시 강력 추천)
껍데기 없이 알맹이만 판다는 알맹상점에 다녀왔다.
대나무 칫솔, 샴푸바, 립밤, 반려동물 비누를 샀다. 저 눈 달린 물건은 바닷가에 버려진 소주병으로 만든 배지다. 귀여운 게 역시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