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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a May 31. 2022

살아있는 사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뭔가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사람 같다는 생각.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그 생각에 끝은 이렇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증명이라는 말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모종의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대체 나는 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건 아마도 사회의 법이나 질서와 같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결국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물론 법과 질서가 있다고 해서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법과 질서를 지키며 안정 속에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정 속에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나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싶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그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 나는 나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무릇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적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처럼 살지는 말아야 하니까.      


    

살다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유가 아예 없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확연히 도드라지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뭔가에 사로잡혀 신나게 글을 쓴다. 시작점에서 꽤 멀리 왔을 때쯤 슬슬 불안감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불안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불안 때문에 지금까지 썼던 글을 다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계속해서 묵묵히 쓰는 것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럴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추스르는 일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내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우리 삶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몸이든 마음이든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균형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는 잡히지 않는다. 부단히 움직여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걷는다. 매일 같은 시간에 걸음으로써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균형을 되찾는다.     


어제 나는 두 가지 뉴스 때문에 분노에 휩싸였다.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악마까지 끌어다가 그들을 비난하고 말았다. 그 하나는 이런 것이다. 이웃 간에 벌어진 일로 상대방이 자신을 때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차라리 이 정도였다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으로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콘크리트 틈 사이로 올라온 풀꽃에서도 생명이 얼마나 신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생명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취급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전직 대통령의 사저 앞에서 원색적인 욕설과 비난이 난무한 장면에 나는 분노하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지지하지 않았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임기를 다 마치고 시골에 내려가 노후를 보내려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결국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두 가지 뉴스로 인해 한참 동안 열을 냄으로써 다시 균형을 되찾기 위해 걸어야 했다. 어제는 평상시보다 더 많은 시간을 걸었다. 그리고 걸으면서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난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그들의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평화롭기를 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빈다. 자신을 사랑하기를 빈다. 그러면 타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 누군가에 대해 또는 어떤 일에 대해 분노할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내 삶을 증명하는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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