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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스카 Jun 30. 2022

(Take #5) 42세, 혼자만의 제주

자고 걷고 타고 오고

 목이 따갑다. 너무 건조한가? 아무래도 6인실에서 자다 보니 산소량이 부족했을 것이고 건조함도 추가되어겠지. 그래도 얼른 일어나서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겨야겠다. 대충 씻고 짐을 챙겨 나간다. 나가려는 찰나 어제 인사한 대학교 후배도 마침 나오려 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근 친구의 좋은 태도는 인상에 남는다. 같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해주는 조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격려와 응원도 많이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헤어진다. 잘살아라 후배야!


오늘은 목표가 있었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지인들이 추천했던 올레 7길. 마침 내가 묶은 게스트 하우스가 올레 7길의 시작점 근처였다. 이런 우연이. 김포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4시 40분. 지금은 오전 08시 30분. 오늘 나는 올레 7길을 걷기로 한다. 가급적 종일.


 안내된 올레길을 따라나선다. 3일 차의 제주 아침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 많지도 그리 적지도 않은 양의 비. 나는 우산도 우비도 없이 그냥 걷기로 했다. 조금 젖으면 뭐.. 집에 가서 세탁하면 되지. 가족도 없어 부담이 덜해서 그런지 20 대 시절 마인드가 저절로 생긴다. 대학생 때는 학교 인근 지하철역과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의 거리가 좀 있었는데-걸어서 20분?- 비 오는 날 가끔 혼자 비를 맞으며 걷기도 했다. 그냥 비를 맞고 있으면 이상하게 시원한 느낌? 지금 생각해보면 '명상'같은 효과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비를 최대한 맞지 않으려 애썼다. 비 한 방울을 맞으면 마치 큰일 나는 것처럼. 사실 조금 비를 맞는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서 비를 맞기로 했다. 왠지 제주의 비는 깨끗해서 맞아도 머리가 빠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 올레 7길 입구 >


 그렇게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이상한 잡생각도 참 많이 한 것 같다. 한데 아무 생각도 기억에 나질 않는다. 또 걸으면서 주변의 풀들과 나무들은 정말 많이 보게 된다. 차를 타면 절대 볼 수 없는 것. 차를 운전해서 제주여행을 할 때는 오로지 '목적지'를 보고 가야 했고, 나의 길을 방해하는 요인들(정체, 애매한 길 등)을 제거해 나가는 일뿐. 하지만 걸을 때 비로소 길 옆의 제주의 풀들과 나무, 그리고 길의 '바닥'을 보게 된다. 내가 이렇게 바닥을 유심하게 본 적이 있었던가. 아름답게 덮인 아스팔트와 아스팔트 알갱이 사이로 흐르는 빗물. 수많은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며 자국을 낸 아스팔트 길. 그 길은 얼마나 많은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을까. 얼마나 많이 아프고 했을까. 사람은 항상 높은 곳을 바라보고 목표를 세워서 한 걸음씩 내딛지만, 사실 그 모든 걸 받혀주는 건 '바닥'인 것 같다. 누군가는 낮은 곳, 바닥에서 받쳐주고 있기에 또 누군가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 얼마 전에 만난 친형이 그랬다. 항상 높은 사람만 보지 말고 주변에 청소하시는 분, 구두닦이를 하시는 분등 낮은 곳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라고. 그 말 뜻을 이제 이해할 것 같다. 


 다시 올레 7길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올레 7길은 정말 명품이었다. 지나는 길은 제주 남쪽 해안 절벽을 따라 나 있었고, 그곳에는 말로 다 표현이 안될 바위와 기괴 암석, 파도와 바람이 있었다. 이에 자동차로 올 수 없는, 오로지 두 발로 와야만 볼 수 있는 그런 풍경. 내가 만약 혼자 제주를 오지 않았다면 이런 풍경은 죽을 때까지 몰랐겠다. 



 파도는 거칠었지만 바우에 부딪혀 부서질 때는 속이 다 시원했다. 이게 물멍인가? 외돌개의 뽀쪽한 암석은 '남근석'을 닮았다고 주변에 관광객들이 웃음기 넘치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저런 바위가 만들어졌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겸손해진다. 발걸음을 옮기도 또 옮긴다. 야자수 길을 지나 강정포구 쪽으로 향한다. 


< 올레 7길에 활짝핀 수국과 야자수 나무 >



시계는 12시를 향하고 있고 내 배꼽시계도 점심이라고 알려주었다. 또 걷다 보니 해녀촌이 나온다. 아마도 해녀분들이 많이 활동하시는 마을 같다. 해녀들이 계시는 건물을 지나니 해녀체험 코스도 있었고 그곳에서 운영하는 작은 식당도 있었다. 창가에서 바라보니 세 가족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은 그 식당으로 향한다. 1인 여행이라 예산을 많이 가져오지 못해서 만원짜리 해물라면을 먹는다. 우도에서 먹었던 것만큼 푸짐하진 않지만 해녀분들이 직접 잡아 온 홍합, 전복, 조개가 있어서 그런지 국물이 신선하고 맛있었다. 



 해물라면을 먹고는 다시 걷는다. 바람은 시원했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시계는 어느덧 1시를 가리킨다. 이제는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 2박 3일의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던 여행. 충분히 혼자 있었고, 충분히 걸었고, 충분히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속에 맑은 물을 채웠다고나 할까. 다시 제주에 온다면 가족들이 같이 있겠지. 우리 아들, 딸도 꼭 컷 혼자 제주를 여행하기를 권하겠다. 한번쯤은 완벽히 홀로 있는 것도 너무 좋은 것 같다. 굿 바이 제주. 굿 바이 관종들. 굿 바이 지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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