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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Sep 18. 2023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ㅡ 만남의 철학

The voyage of philosophy (철학의 항해)

철학의 항해 90. “나와 너 만남의 철학”,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강독




철학의 항해 90. “나와 너 만남의 철학”,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강독


 


① 마르틴 부버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년 ~ 1965년) 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이다. '나와 너'의 관계를 기초로 한 인격주의적 철학은 실존주의와 함께 제1차 대전 후의 유럽, 미국의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 또한 정신의학계에까지 넓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부버는 하시디즘 (신비주의적 유대교)에 깊이 참여하였다.


 


② 요지


 


부버의 저서 ‘나와 너는’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를 망각하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인격적인 만남의 의미를


강조하여 큰 각성과 감동을 준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만남이다,


즉 삶의 의미는 만남에 있다는 것이다. 만남을 체험이라고도 한다. 만남 혹은 체험에 대립하는 것은 경험과 이용이라는 개념들이다. 경험과 이용만 가지고는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부버의 책 “나와 너”의 요지이다.


(이하 동영상 강의 참조)


 


③ 1인칭, 2인칭, 3인칭 철학


 


부버 철학의 특징은 문법 용어로 그의 철학의 기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1인칭 나, 2인칭 너, 3인칭 그것을 이용하여 기본 개념을 만든 것이다. 나(1인칭)을 중심으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 개념쌍이 기본이다.


 


만남의 철학자 부버의 철학의 출발점은 나 혹은 자아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데카르트적인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Thinking I)의 확실성을 중심으로 철학을 구성했다. 그리고 루소나 칸트, 피히테, 헤겔 등의 거의 모든 근대 철학자들은 모두 사유하는 나의 철학 즉 주관성의 철학을 수립한다. 즉 주관과 객관의 철학이다. 주관을 중심으로 객관이나 대상이 만들어 지거나 구성된다는 식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철학자 부버는 자아가 고립될 수 없다고 한다. 즉 자아는 항상 타자와 같이 존재한다. 그는 “태초에 관계가 있다” 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런 타자는 크게 두 가지이다. 즉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인 너와 나의 대상이 되는 사물적 존재인 그것이다. 이처럼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 부버의 두 가지 원리이다. 나와 너의 관계를 체험(Erlebnis) 혹은 만남 (encounter) 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나와 그것의 관계는 경험(Erfahrung, experience) 이라고 한다.


 


④ 말 vs 사유


 


근대 철학은 보통 이성이나 사유를 철학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부버는 만남의 철학자답게 사유가 아니라 언어 혹은 말을 중심으로 삼는다. 플라톤은 말과 사고가 근본적으로는 같다 라고 천명했다. 그는 “소리를 내는 사고가 말”이고 반대로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가운데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하는 말을 사고”라고 했다. (테아이테토스 190)


 


근대철학이 사고하는 자아를 철학의 출발로 삼았는데 비하여 부버는 말하는 자아(또는 말하는 자)를 철학의 출발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근본어, 근본언어(primary word) 라는 개념을 쓴다.


즉 말을 통하여 나와 너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근본어 혹은 근본언어들은 고립된


단어들이 아니라


결합된 단어들이다. 하나의 근본어는


나-너 라는 결합이고 다른 근본어는


나-그것 이라는 결합이다”. 이처럼


사고가 아니라 말을 철학의 수단으로


삼는 점에서 부버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의 한 특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도표 참조)


 


나-너 결합이라고 해서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2인칭 어법이 다 나-너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 혹은 당신 또는 여러분 이라고 2인칭을 쓰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부버가 말한 나-너 관계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구나 수단으로 쓸 수도 있다. 명령하고 지시한다.


 


부버는 “사람에게 사람의 2중적 태도에 따라 세계는 2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하는 근본어들의 2중적인 성격에 따라 2중적이다. 근본어들은 고립된 단어들이 아니라 결합된 단어들이다”.


 


⑤ 나-너 vs 나-그것


 


나-너와 나-그것의 차이는 전체와 부분의 차이이다.


즉 부버는 “근본어 나-너는 전체이다” 그러나 “근본어 나-그것은 전체가 아니다” 라고 한다. 이 뜻은 자명하게 이해된다. 우리가 너 혹은 당신 이라고 말할 때 대상은 내 앞에 있다. 이 때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오직 너 만이 내 앞에 현전한다. 이게 나-너 근원어의 핵심이다. 그래서 부버는 나-너 만남을 항상 전체성, 혹은 배타성 그리고 현전 등으로 표현한다.


 


그 반면 나-그것의 영역은 주로 타동사의 일반적인 사용에서 알 수 있다.


즉 내가 무엇을 본다, 무엇을 느낀다. 무엇을 상상한다, 무엇을 의욕한다, 무엇을 생각한다 등에서 나-그것이 드러난다. 즉 나의 행위의 대상으로서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이다.


 


대상의 전체성과 상대성 문제는 불교의 연기설과 연관된다.


사물은 반드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즉 이것은 저것에 의해서 한정된다. 사물의 세계는 이것과 저것 혹은 어떤 것 (something)과 다른 것(other)이 상호의존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라고 한 것이다. 연기설(緣起說)이다. 이처럼 이것과 저것이 있는 세계가 바로 나-그것의 세계이다.


 


나-너가 말해지면 화자에게는(speaker) 대상이 되는 사물이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서 한정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너가 말해지면


상대적인 존재인 사물은 사라진다.


그래서 부버는 “너는 한계를 갖지


않는다” 혹은 “너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 고 말한다. 화자는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이것과 저것은 사라진다. 세상이 사라진다. 마치 찬송가에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와 같은 상태이다. 여기서 나-그것의 나는 사라지고 나-너의 너는 현전한다.


 


 


⑥ 나-그것, 경험, 대상화


 


근본어 나-그것은 다른 말로 내가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를 그 표면위로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을 찾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지식을 도출하고 대상화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부분만을 아는 것이다. 사물은 항상 다른 사물과 함께 있기 때문에 사물을 경험할 때 세상의 부분만을 본다. 경험은 분석하고 규정하는 것이며 결국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나이가 몇 살이고 어디 출신이다. 연봉은 얼마이고 아파트는 몇 평이다 와 같은 식으로 세상을 대상화시킨다..


여기에 비해서 나-너는 세상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관계 맺는 것은 인격적이다.


즉 세상과 내가 1대 1로 서는 것이다.


 


부버에 의하면 이런 이런 관계의 영역은 3가지이다.


 


ㄱ. 자연과의 만남이다. 자연은 말은 없지만 우리가 자연을 너 라고 부를 때, 우리는 언어의 문턱을 넘는다. 여기는 동물이 포함된다. 반려견 등.


ㄴ.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ㄷ. 예술과의 만남이다.


 


 


⑦ 사랑과 나-너 관계


 


사랑하는 사람도 나-너의 관계를 모르면 그 사랑은 경험에 불과하다. 즉 사랑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직 사랑의 관계에 들어 온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나 중심의 사랑이다. 즉 내가 느끼고, 즐거워하고,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 나는 상대방을 나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경험으로서의 사랑이다. 가령 이 여자 저 여자 경험해 봤다고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곧 나-너의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다. “사랑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고, 돕는 것이고 치료하는 것이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고, 구원하는 것이다.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이다” 라고 부버는 말한다.


 


부버는 사랑의 감정과 사랑의 관계를 구별한다.


감정은 사람 속에 있지만 사람은,


인간은 사랑 안에 있다 라고 한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사랑의 느낌만을 보는 사람은


아직 나-너의 관계를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사람은 결국 신적인 사랑으로 연결이 된다." 남자가 그 아내와 같이 있을 때 영원한 언덕을 동경한다 라고 한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영원한 너를 보는 것이다.


 


⑧ 영원한 너, 종교적인 너


 


위에서 본 것처럼 사람이나 꽃이나 그림이나 특정한 너는 결국 영원한 너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너는 곧 그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만남의 너는 곧 경험의 너로 바뀔 수 있다. 황홀한 나와 너의 만남에서 일상의 부부로 전환된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다 라는 말이 있다. 즉 관계의 너가 경험의 너로 바뀐다.


 


영원한 너는 종교적인 너를 말한다. 보통은 신이나 절대자를 말한다. 그러나 부버는 그의 만남의 철학의 관점에서 이를 다시 묵상한다.


부버는 만남을 신비라고 한다. 그러나 종래의 신비주의를 비판한다. 신비체험 가운데서 자아를 상실한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이다. 그는 내가 절대적인 타자(신 혹은 열반) 에게 흡수되는 각종 교리를 비판한다.


 


그가 생각하는 건전한 신비주의는


구약성경 이사야서 40장 31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즉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 즉 절대자와의 신비적인 만남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지 않고 살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즉 영원한 나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하여 내가 힘과 용기를 얻는 건전한 신비주의를 주창한다.


 


 


 


 


또 그는 종교 의식 즉 집단적인 행사로서의 종교를 비판한다. 이는 신을 경험의 대상으로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상 숭배 같은 경우이다. 이는 인간이 신을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본다.


 


그가 바라는 종교는 나-너 상호성을 통한 행동과 변화 그리고 힘을 주는 종교이다. 이것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https://youtu.be/MBLNFAAfL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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