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
너희 엄마 아파트에 사시니?
위치가 어딘데?
몇 평이야?
몇 층?
단지는 몇 세대야?
지은 지는 얼마나 됐니?
아파트 이름이 뭐야?
엄마가 사는 아파트 내부를 도배할 일이 생겼다. 작년 말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숨고를 통해서 견적을 받았다. 견적서를 보며 괜찮은 업체 몇 개를 고르던 중 문득 인테리어 일을 한다는 대학 동기가 떠올랐다. 얼굴을 본 지는 십여 년이 훨씬 지났지만 간간이 소식을 들었던 터라 이왕이면 그녀의 업체를 이용해 주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녀와 연락이 닿았고, 며칠 후 작업 견적을 내기 위해 그녀가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거의 십여 년 만이었다.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그 만남을 계기로 나와 그녀를 포함한 대학 동창 몇 명이 구정 연휴를 이용해서 만나기로 했다. 모임을 알리는 나의 전화에 대학 동기 은정이는 내가 어떻게 해서 그녀와 연락이 닿았는지 물어보았고, 엄마 아파트 도배 때문에 연락했다는 나의 대답에 은정은 내게 위와 같은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은정의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는 집에 대한 질문은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자가인지 아닌지에 따라, 사는 지역에 따라, 아파트 브랜드 명에 따라 대략 상대방의 자산 정도를 짐작할 수 있기에 집은 상대방의 자산을 평가하는 여러 잣대 중의 가장 대표적인 잣대이다. 포털 사이트에 지역과 아파트 명만 검색하면 그 아파트의 시세를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상대방의 집에 대한 질문은 조심스럽고, 대화 속에서 은연중에 드러날 순 있어도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그동안 나의 생각이었다. 부모 형제 간이 대화가 아니라면 말이다.
예상치 못한 은정의 질문에 나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동네 명을 말해줬고, 몇 평대인지(나도 몇 평인지까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세대수, 층수, 준공한 연도까지 말하는 동안 나는 심문을 받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모든 질문에 대답한 후에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게 사적인 것까지 묻는 건 실례야. 요즘 아무리 친해도 그런 것까지 물어보진 않아."
"너희 집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너희 엄마 사는 집을 물어본 건데 그게 왜 사적인 질문이니? 00은 자기 엄마 이야기 다 하더라" 은정이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 나의 엄마가 사는 집에 대해 물어본 거니 사적인 질문이 아니라니. 우리 엄마가 사는 집은 왜 이 자리에서 까발려져야 하는 거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연휴에 동기들과 만날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고, 친구들의 소식을 주고받은 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오랜 기간 해외에서 살았었다. 그곳에선 유럽 문화의 특성상 웬만해선 상대방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곳은 정부의 개인정보 처리에 대한 규정 강화 기조에 따라 개인정보 처리에 아주 민감하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질문은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친구 간에 이런 질문할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민감했나, 싶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불과 삼사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고, 이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부동산 시장은 급랭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부동산 거품에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지만, 이미 부동산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은정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때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외쳐서 장안의 화제가 된 카드사 광고가 있었다. 광고 덕분에 카드 발급률이 꽤 높아졌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광고사 관계자는 '부자 되세요'의 의미는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젠 숨 좀 트이시죠. 여러분의 꿈과 희망을 우리가 성원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의도야 어쨌건 그 광고 이후에 한국사회에는 노골적으로 돈을 선망하는 문화가 퍼졌다. IMF를 거치며 노동시장에선 해고가 자유로워졌고, 사회 곳곳에 만연했던,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망이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 부자 되세요!"였다.
그리고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된 지금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돈을 선망하는 사회이고, 나와 하등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평범한 친구 어머니의 자산까지도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의 행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그녀가 보낸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녀의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그녀가 추구하는 것을 같이 응원하고, 서로의 소소한 관심사를 나누고, 서로가 새로 시작한 취미생활을 소개하는 대화를 나눌 순 없는 걸까?
내 생각이 옳고, 은정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과도 이런 상황을 종종 마주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가 친구를 사귀면 아이의 부모는 그 친구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지,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고, 친구 집이 몇 평인지, 친구 아버지 직업이 무엇인지, 친구는 반에서 몇 등하는 지 묻는다는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굳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의 자산보다는 상대 그 자체에게 더 관심을 갖는 사회 분위기. 현실성 없는 나의 바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