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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파물해 Sep 14. 2023

거리의 아이

역대급 아이 C

나의 두 번째 발령지는 대도시에 위치한 ㅁㅁ학교였다. 그때까지 난 대도시의 학생들은 첫 학교인 시골학교와 다르게 모두 학구열이 높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단단한 착각이었다.


ㅁㅁ학교는 개교한 지 3년 차 되는 학교였다. 지금은 유명한 신도시가 된 지역이지만 그때만 해도 재개발이 막 시작될 때라 학교 앞 도로는 비포장도로였고, 학교 주변에 '철거민 몰아내는 **시 각성하라!' 같은 무시무시한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이 많이 사는 도심에서 학교를 오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근처에는 버스 차고지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신설학교는 초반이 중요하다. ㅁㅁ 학교는 이른바 초반부터 '망한' 학교였다. 학생, 학부모들은 굳이 도심과 떨어진 이곳까지 오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결국 비선호 학교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퇴학이나 자퇴를 경험한 학생들이 몰렸다. 이른바 ‘노는’ 아이들이 몰리는 악명 높은 학교가 된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주변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징계를 받고 퇴학당했거나 퇴학 비슷한 자퇴를 당했던 아이들이 몰렸다. 그 시절 외고, 특목고가 늘어나고 한편으로는 특성화고 지원이 활발해지면서 이런 어중이떠중이 인문계고등학교들이 생겨났다. ㅁㅁ학교의 1학년에는 이렇게 '꿇었던' 아이들이 30명가량이나 있었다. 자퇴생이 아니더라도 중3 시절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까지 몰리는 학교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근무 난이도가 올라갔고, 내가 그곳에 배정받았다.


난 1학년 담임이었다. 담임 반 첫 조회를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맨 뒷자리에 앉은 남자애들 다섯 정도가 말 끝마다 욕설을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작년에 근처 특성화고에서 '짤린' 아이들이다. 우리 반에 5명이나 복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앞자리에 겁에 질린 얼굴의 아이들이 눈알만 굴리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학교를 쓴 아이들은 1 지망을 희망했거나, 제일 아랫 순위인 10 지망을 희망했다. 10 지망이란 절대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우리 학교 희망자가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배정받은 것이다. 10 지망 아이들은 첫날부터 울먹울먹 한 표정이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그 겁에 질렸던 표정의 아이들 중에도 중3 시절에 난다 긴다했던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호랑이가 떠나면 여우가 왕이 되듯이, 복학생들이 자퇴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그 다섯 명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이 교실에서, 아니 전교에서 눈에 제일 띌 법한 아이 C가 있었다. 아이.. 라는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다. 머리는 노란색이었고, 팔 전체에 문신이 있었다. C는 교복을 안 입고 문신을 드러내는 반팔을 입고 있었다. 그때는 10년 전이라 지금처럼 길에서 문신한 어른을 보는 것도 쉬운 편이 아니었다. 나는 당황했다. C도 복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반 복학생은 여섯 명이다. 첫 만남에서 간단한 규칙을 안내하려는데 C가 다짜고짜 이야기한다. "오토바이 타고 왔는데 주차장에 대면되죠?"


다른 쪽의 복학생 다섯 명이 낄낄대며 서로 웃다가 나를 본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아이들이 더 겁에 질린 눈으로 그 아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이 무서운 분위기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모두가 주시하고 있다. 두려운 눈빛을 하는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 울 것 같으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 줄래..‘


그랬던 C와 조금씩 래포를 형성해 갔다. C 때문에 경찰서를 처음 가 보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와 저녁약속 중에 C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서에 와 있는데 자신을 데려가 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로 멀리까지 온 친구한테 "미안, 나 가봐야 해. 일어나자." 하고 경찰서로 향했다. C는 부모님 대신 나를 불렀다. C의 어머니는 2살쯤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C를 고모에게 맡기고 사라졌다가 1년쯤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고모가 C를 키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러나 고모의 헌신에도 C는 관심이 고픈 아이로 자랐다. 그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 생각해 보니 C의 어린 시절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부모의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어린아이 C는 혼자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C는 점차 집보다는 형들과 어울려 다녔고, 그때 당시 집 대신 친한 형이 하는 타투 가게에서 지내고 있다 했다. 폭행 사건으로 경찰서에 간 C는 고모나 아버지 대신에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C는 나에게 더 마음을 열었다. 나도 C에게 최선을 다했다. 물론 C 외에도 우리 반에는 수업 중에 욕하고 뛰쳐나가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C에게만 관심을 쏟을 수는 없었지만 C는 상담하며 나누는 나와의 대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C는 문신도 점차 지우겠다고 했고 타투이스트로서의 꿈도 생겼다 했다. (이 두 가지가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학교도 자주 나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를 나오는 날에는 갑자기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쏘고, 심지어 교무실까지 돌렸다. C를 무서워하던 우리 반 아이들도 C형, 오빠 은근히 웃기고 좋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씩 올라오는 분노조절장애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도에서 2학년 국어 선생님이 C의 욕설을 지적하고 지나가셨다. C는 지지 않고 관심 끄라고 따지면서 교실로 다시 들어갔다. 국어 선생님이 내게 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 주셔서, ‘아 이번 수업이 끝나면 C와 좀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수업이 시작하고 얼마 뒤 갑자기 우리 반 반장이 교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샘, C오빠 C오빠!!!"


놀라서 복도로 나가보니 C가 교실에서 흡사 헐크처럼 교복 셔츠를 양손으로 뜯으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C는 소리를 지르며 복도 중간에 있는 교무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창문을 쳐 깨트려 와장창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소란에 놀라 수업 중이던 선생님들이 문밖으로 나온다. 학생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뒷문으로 고개를 내민다. 수업 중인 선생님들 중, 학년부장 선생님과 덩치 좋은 체육 선생님이 C를 말리러 오셨다. 담임인 내가 C를 잡았다. 지금 남녀가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C는 우리 반 아이니까, 그동안 쌓인 정이 있으니 나를 보고 좀 봐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C는 누가 자기를 잡는지도 모르는 채 교무실 앞에 있는 계단을 걸어 한 층을 올라갔다. 한 층을 올라가면 2학년 교무실이 있고, 방금 C를 지적한 국어 선생님이 있는 곳이었다. 소란에 놀라 2학년 교무실에서도 선생님들이 뛰쳐나왔고, 그들 중에는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사실 그 선생님은 임신 중이셨다. 배가 꽤 나와 있었지만 C가 그것을 배려할 리 만무했다. C는 그 선생님에게 달려들며 “x발, x친x,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이 설명할게, 잘 들어봐." 선생님은 그 와중에도 교사로서 C에게 자신이 지도했던 상황을 설명하려 하셨다. 다른 학년인 C를 잘 모르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난 너무 잘 안다. 지금은 피해야 한다.


“선생님, 들어가세요. 제발." 나는 그 선생님께 다급하게 말하며 C가 임신 중인 선생님을 때리지 못하도록 C를 잡고 매달렸다. 따라온 학년부장 선생님과 체육선생님도 C의 팔을 잡았다. C가 놓으라고 욕을 하며 두 남자선생님을 밀쳤다. 나이가 있는 학년부장 선생님은 내동댕이 쳐졌고, 덩치 좋은 체육선생님은 힘으로 버텼지만 분노한 C는 진정하지 않았다. 아니 제압되지 않았다. 그러다 최선을 다해 C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려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C가 나를 때리지 않았다. 담임이라고 그동안 쌓인 정이 있어서인지 이 파국에도 나는 때리지 않다니.. 약간 감동받았다.


그날의 광경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신이었다. 권상우도 교실 복도 창을 깨며 욕을 날린다. 그런데 영화 속 장면은 짧았는데, 내가 본 현실 상황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C의 난동시간은 10분을 넘어가 그날 1, 2학년의 모든 반이 해당 교시 수업을 거의 못하다시피 했다. 결국 C는 나와 체육 선생님께 끌려 건물 밖으로 나갔다. 교감 선생님이 올라오셔서 한 시간 가까이 밖에서 C를 달랬다. 임신 중이었던 그 선생님은 그 후 어떻게 되셨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임산부에게 최악의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지금은 10살이 넘었을 아이와 행복하시기 바란다.


C는 그 일 이후에도 학교를 계속 다녔다. 퇴학 조치는 학교에게 큰 부담이 따르는 것이라, 웬만하면 퇴학은 없었다. 출석정지 며칠이 나왔지만 어차피 학교를 들쭉날쭉하게 다니던 C였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그 뒤 C가 학교를 관두게 된 일이 생겼다. 복도 창문을 통해 교실에서 나오는 것을 교무부장 선생님이 지적한 것이다. C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심한 욕을 했다. 이쯤 되면 규칙을 어긴 C가 잘못한 건지, 그것을 지적한 선생님들이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C에게는 유사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학생인권이 강조되는 상황 속에서, 학생을 퇴학 조치하면 교육청 감사 등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는 먼저 학생에게 자퇴를 권유한 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차피 퇴학 처분을 하겠다는 반협박을 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자퇴를 선택한다. C가 그 처분을 받았다. (임신한 선생님에게 욕설하고 때리려 한 더 큰 난동을 부렸을 때는 무사히 학교를 다니던 C가 이번에는 사실상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교사에 대한 욕설과 폭력이 두 번 반복되었기 때문에 유사 퇴학을 당했구나 하기에는 찜찜한 부분도 있었다. 임신한 선생님은 기간제 선생님이었다. 기간제 선생님께 한 행동과, 선도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교무부장님께 한 행동의 여파는 달랐다.)


이렇게 거의 일 년간 학교를 다녔던 C는 학교를 떠났다. 시원하겠다고 한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난 묘한 감정이었다. C에게 심각한 교권 침해를 당한 선생님들께는 미안하지만 안타깝고 서운했다. 학교를 떠난 C는 연락도 없었다.

“C 연락 없어? 담임선생님은 끔찍이 좋아하는 것 같더니 희한하네.” 학년 부장 선생님의 말이다. 나도 서운했지만, 그렇게 C를 조금씩 잊어갔다. 그런데 다시 그를 되새기게 된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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