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Feb 26. 2024

광화문에서 영화를 기다리며


명절 연휴의 카페에는 의외로 나이가 지긋하거나 가족 단위로 보이는 손님이 많다. 저마다 잘 차려입고 시내를 나온 모습에 설렘과 여유가 느껴진다. 나 또한 아이를 언니네 집에 맡겨두고, 아이의 긴 겨울방학 기간 동안 누리지 못한 여유를 누린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두 편의 영화를 예매했다. 큰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는 잘 상영하지 않는 종류의 영화들이다. 이십 대 시절에는 이곳에서 하루에 세 편을 내리 보기도 했다. 여름휴가 기간에는 서울 시내 예술영화 상영관들을 돌며 ‘씨네 바캉스’를 꼭 보내곤 했다. 지금의 내 극장 체험은 주로 아이와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 한국어 더빙 버전에 치우쳐 있다.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모든 시간 -기다림, 예고편 상영, 엔딩 크레디트, 영화관의 공기와 냄새, 옆자리의 팝콘 소리까지- 을 사랑해서 집에 극장 의자를 두고 싶을 정도였던 나에겐 지금의 현실이 꽤 퍽퍽하다. 그러니 모처럼 아이와 떨어진 휴일, 득달같이 광화문 시내로 달려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은 시절이다. 그 시절 즐겨 다니던, 스노우캣 그림이 그려진 테이블이 있던 카페도 없어졌고 영화 티켓은 종이 영수증이나 모바일 티켓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이제는 환경 정책으로 극장마다 꽂혀 있던 영화 소개 전단도 없어질 거라고 한다. (그래도 환경에 대한 염려는 언제나 환영이다. 추억보다 소중한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극장에 주로 걸리는 영화들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내가 극장을 찾지 않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씨네큐브 예매를 하기 위해 찾은 사이트에는(회원가입을 해야 하는 등 번거로운 절차가 다소 있었다) 여전히 많은 수의 작은 영화관, 예술 영화관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티켓 값도 프랜차이즈 영화관에 비해 저렴하다.


멈추어 있던 영화 세포를 일깨운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조금 더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억이라거나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거나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아줌마가 된 지금의 나로서 새롭게 쌓아나갈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의 고충은 벗어나기가 어렵고 결과적으로 늙고 죽어갈 미래를 비관하자면 한이 없지만 그 와중에도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발 밑의 조개껍질을 줍듯이 고개와 허리를 조금만 숙이면 그것들은 거기에 있다. 내가, 당신이 발견해 주길 기다리는 듯이.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2024/02/11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 몸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