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과 미용실 그리고 우유부단 사이에서 만난
나의 우유부단함과 관련해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했기에 글로 남긴다.
며칠간 폭풍 작업에 시달린 뒤 모처럼 서울로 놀러를 나왔다. 백화점을 층마다 실컷 구경하고, 카페에서 책도 조금 펼쳐보고. 집으로 가기 전까지 남은 두어 시간. 미용실을 갈까 마침 배가 고프니 국밥을 먹을까를 십여분 간 고민하며 천호역 국밥집 앞에 서있는데 나를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거의 십 년 만에 보는 내 친구 ㅇ언니였다. (친구이지만 ㅇ언니이다. 나보다 쬐그만게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야무진 아이다.) “야! 너 그대로다~” 하고 말하는 그 아이야 말로 너무 그대로여서 나도 놀라버렸다. 놀랍고 반가운 와중에 나는 내 우유부단한 상태를 들킨 것이 부끄러워,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국밥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나도 오늘 점심에 여기서 먹었는데.” 하면서 여기보다 더 맛있는 곳이 있다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십 년 만에 길에서 만난 우리가 국밥에 관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는 것이 일단 너무 웃겼고, 외모만 그대로인 게 아니라 한쪽은 여전히 우유부단하고 한쪽은 여전히 야무진 게 또 너무 웃겨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결국 맛집을 찾지 못하고 ㅇ언니는 약속엘 가야 한다며 내 번호를 저장하고는 떠났다. 나는 그녀가 볼 새라 잠시 몸을 숨긴 채 오분정도 더 고민하다가 국밥집엘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너 만나려고 내가 거기 서있었나 보다. 미용실 갔으면 못 볼 뻔했네.“ 우리는 추석 지나고 만나자, 라는 두루뭉술한 약속을 주고받았다. 약속은 과연 실행될까.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십 년의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고, 지척에 두고도 우리의 거리는 견우와 직녀만큼이나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국밥집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고 멀리서 달려오던 그 아이의 얼굴에서 나는 이미 보았고 알아버렸다. 나만큼이나 그 아이도 나를 그리워했을 거란 걸. 십 년의 거리는 한 달음에 좁혀지고 우리는 만나자마자 시답잖은 국밥 얘기나 미용실 얘기로 몇 시간이고 옛날처럼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란걸. 카톡을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 썼다 지웠다 했던 시간들은 그 수다 속에서 무색해지리란 걸. 그럼에도 어떤 결들은 차마 좁혀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다. 어차피 완전히 겹쳐지는 관계라는 건 없다. 서로를 그리워할 작은 실마리라도 쥐고 있으면 언젠간 반드시 연결되리란 걸 요즘의 나는 자꾸 확인한다.
밤마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자기 긍정 주문(우리는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야,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주어진 모습에 감사하고 자신을 사랑하자 등등)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나의 우유부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 친구의 얼굴을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잘했다 잘했어. 이런 식이라면 얼마든지 우유부단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고민하는 그 기로와 시간 위에서 어떤 관계와 연결될지 모른다. 마치 마블의 멀티버스처럼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는 걸지도. 아무튼 내 친구에게 데려다준 오늘의 우유부단에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쓴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는 그 집 국밥 맛이 어땠는지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수다들이 펼쳐질지 궁금해서 빨리 추석이 지났으면 좋겠다. 밤새 누워 아무 얘기나 하면서 뒹굴거리던 십오륙년 전 ㅇ언니의 자취방은 이제 없지만. 그 세월만큼 각자 늙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아이와 갔던 춘천 중도의 풍경과, 하동의 다락방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먹은 연어의 맛을 기억한다. (야무진 ㅇ언니가 유니클로 히트택 포장재인 지퍼백 봉투에 네모나고 커다란 연어를 얌전하게 담아왔다. 나는 그날 연어를 처음 먹어봤다.) 자취방에서 조물조물 무쳐주던 나물 반찬도. 그 아이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는지 물어보고 싶다. 서로의 기억이 다르다면 그 또한 웃길 것이다. 그냥 그렇게 몇 시간이고 웃긴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너를 빨리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