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이라는 축제, 그 이후의 우리
독서 활동이란 어떤 경우에는 유희이기도 하고 때론 지적 호기심 혹은 지적 활동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삶을 관통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독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 활동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세 번째의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데 그럼에도 그것들을 즐기려면 그것들(문화나 예술이라는 것들)이 인간사의 재현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 속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자 혹은 작가들이 하나하나 돌을 놓아 유인하는 그 길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결국 유희로 시작했던 독서/문화/예술 활동은 궁극의 어떤 순간 우리 자신이 세계 시민이었음을 자각하게 하고 말 것이다.
그것을 견딜 수 있는가. 내가 어느 저녁시간 배달음식을 시켜 놓고 텔레비전 속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그 시간 동안 세계 어느 지도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나의 바로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나의 멀거나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을. 그럼에도 그 시간에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고 겨울옷을 장만하기 위해 인터넷을 서치 하는 그런 삶을 기어이 여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걸 감당할 수 있느냐 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숙제를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지 자꾸 질문한다. 대형 서점에 줄을 선 이들에게 삼 일간 팔려나간 수십만 부의 책으로 우리의 삶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을 것인가 자꾸 질문한다. 모처럼의 호황인 것처럼 신이 난 출판계를 보며 내 일처럼 흐뭇해하고 마치 내 절친한 이가 상을 받은 듯 함께 기뻐하며 덕담을 나누지만 이 달콤한 파도가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무엇이 남아야 할까.
수십 년 전 역사를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그 일들이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듯 한강, 그리고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진보-보수진영의 온도차와, 한강 혹은 그의 소설들이 페미니즘인지 아닌지 가려내고자 하는 논쟁들을 보며 우리들 역시 여전한 현재진행형의 역사를 살고 있고 그 인물들의 삶 속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책은 책으로 봐야지. 문학은 문학으로 봐야지. 예능은 예능으로 봐야지. 그렇게 넘기고 넘겨온, 묻고 묻어온 마음들이 덜컥한다. (노벨상 수상의)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의 끝에도 어쩐지 마음이 서늘하고 뻐근하여 잠을 설친다. 꿈자리가 사납다. 하지만 나는 또 나의 오늘과 내일을 살아야 하는 걸. 그렇기에 책장을 덮고 걸어 나온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정확히 응시하면서 가고는 싶다. 화려한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혼이 나간 채로 말고 제정신으로는 살아야겠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축제가 지나고 나면 무엇이 우리에게 남겨져야 하는지, 똑똑히 응시해야 한다.
*<소년이 온다> 중에서,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