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하동 여행
하동에 왔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섬진강이다. 예전에 즐겨 오던 게스트하우스가 휴식기를 보내도 다시 운영하는 걸 알게 되어 급하게 예약을 했다. (알고 보니 중간에 사장님이 바뀌었고, 몇 년 전 다시 문을연 거였다.) 주변에 놀 거리가 없기에 화개장터 장날을 맞추었다. 남들은 별 볼 일 없다 할지 모를 화개장터이지만 나는 퍽 좋아한다. 10년 전에 사 온 무거운 도자기 그릇을 아직도 너무 잘 쓰고 있어서 그것을 산 그릇 가게에는 꼭 다시 가고 싶었다. (알고 보니 장날이 아니더라도 문을 여는 상설 가게였다.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용케 살아간다.)
버스 타고 거의 4시간을 내려와 하동 땅이다. 화개장터와 터미널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고 섬진강을 앞마당 삼아 품고 있는 숙소에 와 짐을 풀었다. 이제 뭘 할까. 짧은 1박 2일 여행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가 없기에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카페(실내)에 앉아 있기, 카페 야외에 앉아 경치 바라보기처럼 한 장소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분화된다. 마치 어떤 선택지에 놓일 때마다 우주가 분화되어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는 마블 식 멀티우주 세계관 속에 있는 것 같다.
우선 오늘 묵을 다락방 창문 너머 보이는 섬진강 풍경을 감상하며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는 이제 할 일을 찾느라 분주하다. 읽을 책 -<무진기행>, 김승옥- 을 가지고 갔음에도 숙소에 딸린 공용공간(이전에는 카페였던 기억이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꺼내다 보니 대여섯 권이다. 다락방 계단의 만화책 서가에서도 두어 권 꺼내 공용공간 테이블에 책들을 잔뜩 쌓아둔다. 그러고는 바깥으로 나가 멋들어진 섬진강 뷰를 향해 놓인 야외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한 숙소의 마당에서 시원하게 트인 산과 물의 절경을 바라본다. 해가 질 때까지 이 풍경을 즐길 것이다.
2월의 늦은 찬 바람이 쌩하고 분다. 해가 산마루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다 다시 실내로 들어와 스피커에 나의 스마트폰 음악을 연결한다.(이제 제법 기계도 잘 다루어 이런 블루투스 스피커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서당개 3년이라더니 엄청난 발전...!) 재즈 라디오 앱의 <Paris Cafe'> 트랙들을 틀어 놓고 그제야 쌓아둔 책으로 간다. 골라놓은 책은 대체로 그림 에세이인데 그중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를 가장 먼저 펼쳤다. 조금 보다가 글을 끄적이고 싶어졌다. 결국 병이 도진다. 이것저것 병. 책을 보려다가 경치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책을 보다가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쓴다. 내친김에 스케치 같은 것도 하고 싶다. 속으로 그마안~ 하고 외친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순 없다. 너는 쉬러 왔잖아.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숙소 하나만 바라보고 경기도에서 하동까지 내려왔다. 짧은 1박 여행에서 뭘 그렇게나 많이 바라고 기대하니. 섬진강이 눈앞에 있고 지리산이 옆에 있는데.
1층 공용공간의 창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마 여기로 오는 다른 숙박객은 거의 없을 것이기에 이제 다락방과 이곳은 모두 오롯이 내 차지다. 내 집처럼 익숙한 <Cheek to Cheek -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이 흐르고, 오기사의 책 옆에는 아까 골라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올려져 있다. 정말로 하마터면 열심히 할 뻔했다. 이제 아무것도 열심히 하지 말고 쉴 테다. 하지만 다락방 내 숙소에 올라가면 나는 또 고민할 것이다. 차를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하동은 차의 고장이니까),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먹을지 삼각김밥을 먹을지, 책을 읽을지 만화책을 읽을지, 가져간 아이패드로 영화를 볼지 드라마를 볼지 말이다. 매 순간이 일생일대의 고민이다.
이제 휴대폰 배터리마저 다 되었다. 정말로 글도 그만 쓰고 쉬러 가야겠다.
그런데 진짜 마지막으로, 지금 나오는 이 노래에 대해 한 마디만.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장기하의 <별거 아니라고>라는 노래인데 꼭 추천하고 싶다. 나에게, 스스로에게 자꾸 해주는 말이다. “별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그대들. 이 말까지만 적고 싶었다. 이제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