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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회피하면 해피하다?

by 수달씨


최근에 심취해서 읽은 책의 제목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이다. 스웨덴 출신의 파란 눈 숲 속 승려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지나온 수행의 시간 속 배움의 여정을 풀어내는 일종의 강의록이다. 읽고 쓰는 모든 행위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터라 하루에 10페이지 이상 나가기 어려워 거의 두 달을 붙잡고 읽었으니 나도 두어 달 같이 수행을 한 셈이다. 실은 이 책이 왜 내 서재에 꽂혀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평소 내가 샀을 법하지 않은 책인데, 그렇다고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의 내가 서점 매대에 놓인 짙푸른 숲 배경의 표지에 꽂혀 내용도 모르고 들고 왔나 보다. 그리고는 방치되어 있다가 다시 어느 날의 내가 책꽂이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자꾸만 끌려서 결국 표지를 넘기게 되었다. 결과는 대단했다. 이 책 띠지에 쓰인 “모든 문장에 줄을 긋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라는 추천의 글처럼 수많은 문장들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곱씹어 소화시키느라 도무지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의 제목만으로 내용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냥 뻔한, ‘자기 수행’이나 ‘명상적 삶‘을 강조(혹은 강요)하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에게 요즘 이런 책을 읽고 있다며 보내주니 친구는 딱 보자마자 “메타 인지**에 대한 내용인가요?”라고 하는 것이다. 아. 그럴 수 있겠다. 그런가 보다. 정확하게 ‘메타 인지‘를 내가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요지는 ‘상황을, 삶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밖에 정리하지 못해서 왠지 저자에게 죄송하다. 훨씬 더 심오하고 명치를 때리는 문장들 투성인데.) 우리가 생각이 많고 생각의 소용돌이에 갇히고 결국 불안해지는 이유는 삶을 통제하려고 해서라는 것. 생각에 자기 자신을 던지지 말고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들여다보고, 내려놓고, 흘려보내라. 아, 그러고 보니 정말 메타 인지적이네. 그렇게 나는 ‘메타 인지’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이후 인지적 오류를 바로잡기에 좋은 몇 가지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하진 않고 있다.

(책 속 문장을 이 글 속에 적지 않을 테니 궁금하신 분은 직접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좋은 문장도 각자가 읽고 찾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책에 대한 리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책을 추천하려는 내적 목적도 있긴 하지만) 그러해서 내가 요즘 상황을 덜 통제하고, 또 내 머릿속 목소리,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흘러나오게 두면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아침 시간 동안 주방에는 설거지거리와 어제 술자리의 파편들이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고, 새로 들어온 급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고, 이틀째라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해야 하지만, 그래서 평소대로 할 일 정리 노트를 꺼내어 오늘의 할 일을 적고 순서를 정리해야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순서대로 진행시키지 않고 그냥 아이패드를 열어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만났을 때 드는 불편한 감정들과, 그로 인해 내가 내뱉은 무의식적인 말실수에 대해 외면하거나 자책하거나 억누르거나 하지 않고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쭉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영 뿌듯해서 어제는 남편에게 ”요즘 내가 이러이러한 말실수를 했는데 이랬어.“ 하고 말했더니 ”그래, 너는 그게 문제야!“ 하며 타박이나 들었다. 나도 지지 않고 “칭찬을 해달란 말이었어, 이 꼰대 아저씨야!” 하고 받아쳐 주었지만.


남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사람은 약간 나를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다. 왜냐면 내가 거의 십수 년 동안 책 보고, 공부하고, 명상하고, 요가하고, 운동하고, 식단관리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마음의 건강에 관한 것들을 이미 타고난 듯이 깨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내 삶을 통제해 가며 배우려고 해도 안되는데, 자기 삶을 전혀 통제하지 않고 아무거나 먹고 운동도 하지 않고 밤마다 누워 스마트폰만 보는 저 배 나온 아저씨는 왜 저렇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거지? 내가 뭔가에 초조해하면 늘 미리 걱정하지 말라, 다 되게 되어 있다며 “네가 그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아직 그 일을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그러면 나는 무릎을 쳤다가도 “전생에 숲 속 승려였어? 왜 다 알아?“ 하며 혼자 열받아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고난 ‘멘털 수저’인 줄만 알았는데 어제는 남편이 “나도 사실 타고난 건 아녔어.”라고 말해서 조금 놀랐다. 고3 수험생활 하던 시절에 불안, 초조가 너무 심각해져서 힘들어하던 끝에 ‘내려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공부도 싫으면 하지 않고 힘들면 자버렸고 그러고 나니 많이 좋아져서 2학기때부터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단다. 그때부터 저렇게 ‘회피하면 해피하다’는 마인드로 살아왔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고등학생 때 그것을 깨치다니 역시 타고난 게 맞아. 내심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무언가를 내려놓는 경험, 정말로 그렇게 해도 괜찮구나, 라고 깨닫는 경험이 내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화였다.


문제는 내가 뭘 쥐고 있는지, 뭘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뭘 내려놓아야 하나. 이 몸으로 하도 오래 살아서, 통제가 일상이고 만성화되어서 내가 무엇을 통제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다. 이틀에 한번은 반드시 머리를 감고, 설거지는 24시간 이상 쌓아놓지 못하고, 청소기는 자주 못 돌려도 물건들은 전부 제자리에 가 있어야만 하고, 마감과 납기일은 곧 죽어도 지켜줘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나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렇게 해야만 행복하다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괴롭고 스트레스와 더 큰 불행이 찾아올 것만 같다. 그렇담 대체 뭘 내려놓아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나를 보며 베란다로 담배 피우러 나가던 남편이 한마디 더 보탰다. ”그냥 너로 살아. 여태 그렇게 살았는데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돼.“ 너무 맞는 말이다. 역시 열받아!


하지만 어제 남편과의 대화로 ’회피하면 해피하다’는 명제를 찾아냈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쓴다. 심각한 도덕주의자(실제로는 악에 찌들어 있을지도 모르면서)로 살아온 내게 ’회피‘는 ’죄악’이었는데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내가 믿던 도덕과 가치,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통제와 관리, 실패로 인한 괴로움과 자기 비난, 그것들 모두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하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다. 음, 그럴 수도 있지, 싶다. 이 정도면 나도 좀 괜찮아진 건가? 요즘은 짙은 안갯속을 걷던 기분에서 확실히 조금 벗어났다. 구름이 조금은 걷힌 기분이다. 정말 긴 시간이었는데. 조금은 햇살이 보인다.






덧. 문득 승려의 삶을 생각해보면 온갖 규율과 통제로 점철된 삶일 것 같은데 ‘통제를 내려놓으라’고 말하시니 묘하게 아이러니하다. 역시 수행은 어렵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다산초당

**메타 인지 :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 (네이버 사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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