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과 상상 Jan 01. 2022

둘째의 귓구멍이 뚫리던 날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저녁, 식탁에서 고등학생 큰딸과 나눈 대화다.


"엄마, 저 오늘 수학 과외 안 하면 안 될까요?"

"왜?"

"곧 기말인데 혼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요. 그냥 기숙사 빨리 복귀해서 저 혼자 공부할게요." 

"아… 당일 취소는 너무 죄송한데 어쩌지?" 

"그런가요?" 

"아빠 생각에도 당일 취소는 좀 예의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곧 수업 시간이고 선생님께서도 널 위해 주말에 일부러 나오셨을텐데."

"음…제가 생각해도 좀 그렇긴 하네요. 하고 갈게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둘째가 혼잣말을 한다.

"헐, 나 지금 좀 놀랐다. 와… 대박"

"응? 뭐가?" 

"언니 말하는 거요.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말할 수 있?"


남편과 나는 동시에 웃음이 쿡 터졌다. 둘째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윤아! 좀 전의 대화는 보통의 부모와 자식 간에 나눌 법한 아주 평범한 대화였지 않니?"

"그런가? 와… 대박인데? 헐."


머리를 긁적이며 놀라움과 민망함이 섞인 표정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너를 보며 웃음과 함께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는 걸 너는 모를 테지. 사춘기 클라이맥스가 어딘지 알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매일매일 극한을 경신하는 너를 보며 암담하기도 또 지치기도 했단다. 언니와 나눈 대화를 들으며 얼마 전 숙제가 미비하다는 핑계로 과외를 안 하겠다통보한 자신이 떠올랐으리라.     


"저 오늘 과외 안 해요."

"왜?" 

"아 그냥 안 할래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몸이 안 좋은 거니? 아니면..." 

"아, 몰라. 몰라. 안 해. 못 해!"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차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화가 낯빛으로 드러나는 순간 저 방문을 힘껏 따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니다.

후~

참자.

후~

참아

하~


출산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라마즈 호흡법을 끊지 못하다니. 진통을 하던 그때가 아이로 인한 고통의 절정인 줄 착각했던 나는 연신 큰 숨을 내뱉으며 진정을 해본다.


물론 내가 성인군자라서 참는 건 아니다. 서살 가까이 차이 나는 애와 볼꼴 못 볼꼴 다 겪은 후인지라 그녀와의 맞짱(?)의 무의미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기분이 풀린 후에야 숙제를 덜 해서 선생님 뵐 면목이 없었고 게으름을 피운 자신에게 화도 났노라 조곤조곤 이야기를 한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네 성격모르지도 않는데 이유를 말하는 게 그렇게나 어렵나 보다.     


갈래 머리를 하고 귀엽게 우쿨렐레를 치던 네가 허리까지 오는 붙임머리를 한 채 일렉 기타를 치게 될 줄 엄마는 상상도 못 했단다. 예술제 때 입술이라도 찍어 바르려고 하면 질색팔색을 하던 네가 아이라인을 예술적으로 그리게 될 줄도 몰랐지. 이번 여름 방학 때 크루엘라라는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 머리를 하겠다는 너를 보며 클라이맥스는 멀었구나 싶어 오히려 마음 내려놔지더라. 가운데 가르마를 곱게 타서 한쪽은 검정 머리, 반대쪽은 흰색으로 탈색한 영화 속 그 주인공 머리를 하겠다는데 쿨하게 오케이를 외칠 엄마가 몇이나 될까?'다음날 크루엘라 머리 대신 붙임머리를 하겠다고 선언한 네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더라고. 하하     


눈도 귀도 닫혔는지 그저 불통으로 지내던 네가 오늘 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에 엄마는 참 감사했어.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죄송하다는 말도 감사하다는 말도 슬쩍슬쩍 흘리  듯하더구나. 절정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라고 엄마 김칫국 살짝 마셔도 될까?


‘자식 때문에 못살겠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엄마 친구들은 뭐라고 하는지 아니?      


야! 너랑 완전 똑~~~~~~같거든!!




하긴 먹고 싶은 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질릴 때까지 먹고,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했던 가 자식 때문에 못 살겠다고 불평할 입장은 못 되긴 하다. 너를 키우지 않았다면 세상은 내 맘대로 된다고 자만하며 살았을 것이고 누군가의 자식을 감히 손가락질하는 우도 범했을 것 같구나. 엄마에게 겸손과 낮아짐을 가르쳐준 네게 감사하는 밤이야. 절정에서 한발 내려온 너의 사춘기에 엄마가 여유가 생기긴 생겼나 보다.      


"엄마, 쟤 사춘기 끝나면 건이가 시작하지 싶은데요?"

"큰딸! 기분 좋은 오늘 그렇게 재를 뿌려야 시원하겠냐?"

"히히 이런 걸 팩폭이라고 하죠. 엄마 화이팅!!!"


그래 화이팅이닷. 화이팅!



작가의 이전글 아주 느슨한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