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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Jan 15. 2024

니체와 키에르케고어, 차라투스트라와 아브라함

『공포와 전율(혹은, 두려움과 떨림)』을 중심으로

  논문의 형식으로 글을 쓰지 않은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 공부의 과정에서 여태 공부했던 키에르케고어를 재정리하는 작업 중에 있습니다. 이에 본래 정리하던 자료들의 형식이 많이 어지럽혀졌고, 이런 자리에서 소상히 출처까지 남기는 것이 예의이자 학문을 사랑하는 이로써 의무라고도 생각하지만 불가피하게 형식을 벗어난 글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니체와 키에르케고어가 비교되는 지점은 수없이 많습니다. 철학계에서 널리 읽히는 영어권 위키는 물론이며, 상대적으로 자료가 빈약한 한국어권 위키에서도 ‘니체와 키에르케고어’라는 이름의 하위 문서가 존재할 정도로 이 두 학자를 비교하는 것은 실로 진부한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학자에 대한 국내의 관심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두 학자를 제대로 비교한 국내 선행연구는 그 수가 적습니다. 바라건대 이번 발제가 진부한, 그러나 그만큼 유의미하다는 방증인 이 비교를 설명하는 데에 밀알의 기여가 되었으면 합니다.

  니체와 키에르케고어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정황상 1) “니체가 키에르케고어를 알고 있었다”라는 점에 있겠습니다. 이는 해외 연구자들이 (조금은 상이한) 연구를 통해서 각자의 방식대로 확신하고 있는 데에 근거합니다. 우선 니체는 (키에르케고어의 실질적 대적자였던) 마르텐센의 저작을 통해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를 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키에르케고어를 연구하려던 계획을 니체가 가지고 있었다는 정황 근거도 (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만) 여럿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니체 역시 안타깝게도 짧은 생애를 보낸 탓에 그런 직접적 연구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하기에 적절한 몇 가지 주제들이 있습니다. 우선 비-학문적인 영역부터 정리해 보자면, 2) 두 사람 모두 짧은 생애를 보냈으며, 3) 그 짧은 생애와 학문 활동에서 상당히 ‘반-전통’적인 사유를 전개했다는 데에 있고, 4) 글을 쓰는 방식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참 읽기 불편하게, 명료하지 않게 씁니다), 5) 각자 자신이 사유의 대적자, 그리고 사랑하던 여인이 그들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6) 그리고 새로운 사유전통을 만들어내며 후대의 철학적 주제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는 점 등이 있겠습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면, 7) 특히 『두려움과 떨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저작에서 각각 ‘아브라함’과 ‘차라투스트라’를 자신들의 사유를 대변하는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 8) 그리고 이 두 인물이 모두 전통적인 사유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으며, 어쩌면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9) 모두 ‘이성 외적인 것’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가졌으며 그것을 강조했다는 점, 10) 철학적으로 “나”의 실존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초극한 끝에는 결국 “모두”를 향해 통일하는 지향점을 지녔다는 점, 11)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겠습니다.

  물론 반대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 이름처럼 『안티크리스트』를 표방하고 있는 반면, 키에르케고어는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니체를 공부하는 이들과 키에르케고어를 공부하는 이들이 두 학자를 비교하고, 종국에는 같은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니체 세미나를 함께하는 여러분은 지난번 제가 불가피하게 불참했던 회차에, --- 선생님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며, 또 기존의 니체에 대한 관심도 덕분에 어떠한 선-이해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말로써 부연을 덧붙이겠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본다면 두 학자의 공통점이 더 선명히 보입니다. 키에르케고어의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나누어보자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그에 대한 해제’를 남기며, ‘결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사실상 해제를 정리한 것에 해당하니 앞선 두 부분을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키에르케고어가 서술하는 것보다 건조한 방식이지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죽이도록 하나님께 명령을 받습니다. 아들을 번제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시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약속된 산에 올라, 칼을 갈고 아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시종인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과 이삭을 구원하고, 그가 보여준 신앙에 대해 인정과 보답을 합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성경의 부분을 ‘윤리’와 ‘신앙’의 모순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반-전통적인 입장입니다. 본래 윤리적인 것이란, 종교적인 것의 현실적 실현 내지는 표현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인다는 것, 이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에 친자 살해라는 반-윤리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 가장 순종하고 순결한 행위입니다. 여기서 모순과 역설이 발생합니다. 어째서 신앙은 반-윤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고어의 입장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것이란 이성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 이성의 산물이라는 ‘윤리’와 그것의 학문화인 ‘윤리학’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합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을 설하는 것이지만, 윤리적인 것은 실제로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즉 언제나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에 처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명백히 합니다. 물론 신학적인 근거에 기대고 있지만, 인간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어긋날 때 그것을 부정하고, 역설이며, 모순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명백히 한계 지워진 이성에 대한 과잉 집착 내지는 오해입니다. 이성은 항구불변한 무엇을 산출할 수 없습니다. 칸트의 저서를 조금 빌려 표현하자면, 키에르케고어는 “이성의 한계 밖에서의 종교”를 과감히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 바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월권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이성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어는 이야기합니다. “사유가 끝나는 지점에 신앙이 있다”라고요. 언젠가 키에르케고어를 처음 읽게 된 계기로써, 어떤 선생님이 키에르케고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알 수(이성) 없으니까 믿을(신앙)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요. 이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것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정지)’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의 실현이라는 목적 앞에서 그 위력이 중지됩니다. 이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신학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 기존의 신학은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신학적, 신앙적 가르침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작용합니다. 교리, 교의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한 삶이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삶이며 가장 보편에 따르는 삶입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어에게 가장 신앙적인 삶은 보편적인 것과 가장 동떨어진 삶, 그러므로 단독자(개인)’의 삶입니다. 여기서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의 핵심적인 사상이 만납니다. ‘힘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강한 인간, 곧 ‘초인’은 키에르케고어에게 강한 인간, 즉 ‘신앙의 기사’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승화됩니다. 보편과 동떨어진 가장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며, 가장 큰 고통들마저도 포용하며 이겨내는 것이 둘의 공통된 지향점들입니다.

  이는 니체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심지어 『안티크리스트』에서조차 니체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의를 표한다고 볼 여지가 더 충분합니다. 이는 예수가 자신의 파토스를, 곧 완전한 개인으로서 당시의 보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에 위배되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텍스트 곳곳에서 ‘진정한 신앙인’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판단을 유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약이겠습니다만 니체가 키에르케고어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 것은, 이 유보해야만 하는 특수 사례, 즉 ‘가장 독실한 신앙인’은 니체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과는 결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인공 신화를 믿고, 교리와 교의에 종속하며, 종교라는 집단에 편승하는 인간과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참된 신앙인이나 예수는 분명히 다른 족속입니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신은 결코 인간에게 위로를 주는 아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을 주는 대상이며, 세상과 동떨어진 완전한 개인으로 살게끔 유도하는 매개입니다. 무신론을 표방하는 실존철학자들이 ‘실존’의 영역에서 (좋든 싫든) 키에르케고어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합니다.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인물들은 키에르케고어가 ‘신앙으로 도피’했다고 말하지만, 키에르케고어에게 신앙은 오히려 도피처가 아닙니다. 차라리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평안한 삶으로의 도피입니다.

  키에르케고어가 신학계에 미친 큰(그런데 동시에, 한없이 작기도 합니다) 영향을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을 절대타자로 승화했다”라고요. 여기서 절대타자라는 말은 ‘형언할 수 없는 대상’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입니다. 재밌는 점은 그 유명한 비트겐슈타인마저 키에르케고어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관심 있게 탐구해보진 않았으나 아마도 이러한 ‘신의 절대타자-화’와 같은 지점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키에르케고어는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의 이해자는 없다는 식으로요. 마찬가지로 신앙의 기사(참된 신앙인)는 누군가의 이해를 바랄 수도 없고, 바라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신앙주의’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해야 한다는 것을, 심지어는 신앙을 지닌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이 겪을, 겪게 될 시련이나 명령, 즉 ‘가장 절대적이지만 가장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이것 역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가장 이기적인 것(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가장 절대적인 것(신의 말씀)’인 역설적 상황이 곧 아브라함이 겪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니체는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니체 역시도 종교철학자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철학은 키에르케고어적인 종교철학입니다. 아주 반-전통적인 종교철학인 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정확히, 가장 본질적인 신학의 계율을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상, 신화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신은 절대타자인 동시에, 내면성, 즉 스스로 행위의 지침이나 양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신이라는 (신앙인들이 참 좋아하는 표현인) ‘내 안의 하나님’을 통해 ‘타자’를 향합니다. 여기에 이성적인 타산은 탈각되어 있습니다. 신을 로고스 자체로 볼 수 있다면, 로고스에 도달하는 길은 에토스(보편성)에 있지 않고 파토스(정열)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과 대화하는 다이몬이 있었던 것처럼, 키에르케고어에게는 자신과 대화하는 신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존재, 즉 보편성을 담지하는 집단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보편성을 통한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허울 좋은 편승일 뿐, 그에게는 신앙도 무엇도 아닙니다. 이로써 이성적인 규범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행위의 규준은 정열을 지닌 개인에게 있습니다. 니체에게 키에르케고어와 같은 족속들은 그의 아주 맹렬한 비판과 조소에서 ‘예외자’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점에서 사실 니체와 키에르케고어는 아주 가깝습니다. 이성 중심의 사유전통과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걷고, 개인의 절대성이라는 특유한 사유가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둘 모두에게 이러한 개인주의가 전체를 위한 병폐가 되지도 않습니다. 니체가 진정한 초인은 이성적 의도에서 벗어난 채 타자를 초인의 길로 이끈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처럼, 키에르케고어에게 신앙을 가진 인간은 이성적 보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래서 더욱 진정으로 타인(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들이 니체를 미워하고 키에르케고어를 사랑하는 것은 참 웃긴 일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차라리 설령 둘 모두를 미워할지언정 니체만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찝찝한 부분이 남아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신’이나 ‘종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그런 것입니다. 말과 언어, 논리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그것도 철학을 하는 인간에게 ‘신’이나 ‘종교’라는 것이 주는 거부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많은 신앙인 또한 그런 내적 모순을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점은,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신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습관이 떠올리는 그러한 신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되려 신은 앞서 말했듯 ‘절대타자’이며, 그렇기에 그러한 신을 믿는 나는 ‘절대적인 개인’입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종교라는 것을 하나의 집단이나, 동일한 장소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두 학자는 모두 종교철학자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성을 초극한 무언가를 지향하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열정으로 삶의 방향성을 설정한 채 살아가는 ‘온전한 개인’이기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성’이라면, 둘은 모두 종교철학자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둘 사이를 여전히 갈라놓는 판단의 문제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논의해 볼 지점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처음 쓴 발제. 급하게, 30분 만에 써 내렸네요. 정말 오랜만에 어떤 참고도 없이 쓰이는 대로 썼어요. 그래서 더 과감하게 추측과 느낌도 공유해 보았습니다.

  아픔은 인간을 성장시킵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은 정체된 것일지도 몰라요. 타자로부터 떨어진 개인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근육도 찢어져야 붙으며 성장하고, 살도 땀 흘려야 빠집니다(저는 왜 빠지기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떨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요.

  아픔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가르칩니다. 주로 후회를 통해서 그렇죠. 더 잘할 걸, 더 열심히 할 걸... 그리고 이 후회라는 이름의 과거는 미래를 향합니다. 앞으로 잘해야지,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해야지. 외부세계와 타인이 없다면 미래도 없습니다. 더 잘할 이유도, 더 열심히 할 이유도 내 밖에 남아있는 외부세계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사람들에게 잘해야겠습니다. 그게 누구던지요. 그게 아픔이 주는 마지막이자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염세적으로 말하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떠난 사람은 끝인 게 아니더라고요. 떠난 게 아니라 무언갈 남긴 겁니다. 그 선물은 제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살아있을 겁니다. 또 그게 다시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는 건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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