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 Mar 30. 2023

너 지금 전화 끊고 싶지? "응"

용건만 간단히. 가능하면 문자로.


1. 전화가 울린다.

상대가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전화가 왔다는 사실만으로 심장이 요동친다. 고요함으로 보호받던 나만의 시간이 기괴한 박자감으로 울리는 진동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 난다. 이 순간만큼은 공사장의 차가운 소음보다도 나의 신경을 자극한다.

'왜 전화했지? 무슨 용건이지? 안 좋은 일을 당했나? 오늘 시간 되냐고 묻는 거 아냐? 오늘은 집에서 쉬고 싶은데... 뭐라고 둘러대지? 먼저 카톡을 보냈는데 내가 못 봐서 전화했나? 아니, 카톡은 온 게 없는데...'



2. 전화가 끊긴다.

1분을 기다린다. 정말 급한 용건이라면 이내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다시 전화를 걸겠지. 1분이 지났다. 카톡도 전화도 오지 않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메시지를 한 통 보낸다. "무슨 일이야? 전화 온 거 이제 봤어."



3. 그렇다. 나는 전화 통화가 두렵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 뉴스에서 아주 반가운 단어 하나를 목격했다. '콜포비아(Call phobia)'. 전화와 공포증의 합성어로, 전화 통화를 기피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 역시 나 말고도 전화 통화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9시 뉴스 한 꼭지에 소개될 정도로 많구나. 콜포비아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비추는 뉴스를 보면서도 어쩐지 나는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전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치 않다. 요즘 세대는 말보다 문자(text)가 편하다는 근거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전화 통화와 대면 대화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차라리 대면을 택한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가 전화 통화보다 낫다는 말이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MZ세대가 선호하는 소통 방식으로 1위가 61.4%로 텍스트를 통한 소통, 그리고 그다음이 대면 소통(18.5%), 꼴찌가 전화 소통(18.1%)이라고 한다. (*구인구직 포털 알바천국, 콜포비아 관련 MZ세대 2735명 대상 온라인 조사 결과) 아주 근소한 차이지만 전화 소통보다 대면 소통이 낫다고 답한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콜포비아'들은 이다지도 전화 통화를 어려워하는 걸까?



4. 상대가 내 시야에 없다는 불안감

내향인이라면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을 관찰하는 게 기본값으로 내재되어 있다. 이건 내향인이 '외향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달된 스킬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상대의 시선 처리, 미간 주름, 손짓 등을 세세하게 관찰하며 말의 의도와 상대의 기분, 공기의 무게를 파악한다.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대답을 할 때 적절한 몸짓, 손짓, 표정을 섞어가며 말한다. 평소 감정 표현이 서툰 탓에 어색한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이런 비언어적 표현이 소통에 큰 도움이 된다.

반면 전화는 비언어적 표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정보를 수집할 수도 없다. 막역한 사이거나 짧은 전화 통화는 문제 될 게 없지만, 대화가 길어지는 경우가 문제다.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어주면 좋으련만 무슨 할 말이 많은지 10분, 20분 전화를 질질 끌어대면 결국 말문이 막힌다. 비언어적 표현을 대신해 목소리에 한껏 감정을 싣다 보면 금세 에너지가 바닥나버리고 만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나의 정보를 수집하던 상대가 이런 내 상태를 모를 리 없다.

결국 "전화받기 어려우세요?", "너 지금 나랑 전화하기 싫어?", "전화 끊고 싶지?", "뭐 해야 할 일 있어?" 따위의 얘기를 듣고야 만다. "썩 중요한 얘기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카톡으로 하면 안 될까? 할 말 다 하셨으면 끊어도 될까요?" 목까지 차오른 얘기를 눌러 삼킨다. 제에발! 용건만 간단히.



5. "여보세요? 내 말 듣고 있어?"

나는 말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이다. 말은 문자처럼 검토와 교정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탓에 나의 생각과 의견을 완벽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특히나 수화기 너머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부담되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다간 늘 후회하기 일쑤라 대체로 말을 내뱉기보다 삼키는 쪽을 택한다. 대면 대화의 경우, 정적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반면 전화 통화는 3초 이상 정적이 지속되면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여보세요? 내 말 듣고 있어?"

비언어적 표현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탓에 나의 말이 곡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두려운가.



6. 통화 하나 제대로 못해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통화, 까짓 거 하려면 또 곧잘 한다. (1~5번의 내용 덕분에 신빙성이 0에 수렴하지만) 군생활을 할 때 상황실 메인 PC 앞에 앉아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응대하는 분대장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직장 상사는 어려운 축에도 못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상관들의 전화를 받아야 했는데, 전화벨이 세 번을 넘어가면 욕을 먹고, 전화를 받은 후에는 모든 질문에 신속 정확하게 답변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맡은 역할은 꽤 잘 수행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문자로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에너지를 써가며 통화로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30초 이내로 용건만 간단히 해준다면 모를까.



7. 알았어요, 노력할게요.

사회생활을 해내려면 콜포비아를 겪는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게 분명하다. 야속하지만 너무 잘 안다! 전화 통화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즉흥으로 나의 의견을 정리해서 말하는 연습도 하고, 일단 오는 전화를 피하지 않는 것부터... (내가 할 얘기가 아니라 그런가, 쓰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문자나 키오스크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전화 통화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한 번쯤 생각해줬으면 한다. 부족한 사람의 노력과 불편한 사람의 이해가 더해지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없다.



+) 이런 기능이 있으면 참 좋겠다.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리고 상대방의 이름이 뜰 때, 짧게나마 용건을 함께 적어 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 [철수 - 넷플릭스 비밀번호] 이런 식으로 전화가 온다면 '아, 철수가 넷플릭스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전화하는구나' 생각할 수 있게끔. [팀장님 - 페이지 오류 발견] 이런 전화는 너무 공포스럽긴 하겠지만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