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 Dec 07. 2022

내향인은 평생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내향인 에세이 <낯가림의 재능>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타고난 기질인데, 내향인은 내향성을 평생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매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고 채찍질해야 한다. 외향인을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언제나 내향인을 숨 막히게 옥죈다.


말보다는 글이 편한, 즉답을 꺼리고 생각이 생각을 낳는 내향인은 답답한 것으로 여겨진다. 큰소리 내지 못하고 쉬이 잘 나서지도 못하는 내향인은 나잇값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 만난 사람과 어울리기 어려워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내향인은 유난 떠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외향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요구에 맞춰 자라왔다. 그래야 멋진 어린이고, 그래야 예쁨 받을 수 있으니까.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 또박또박 큰소리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고, 이 집 아이와도 저 집 아이와도 모두 친하게 지내야 한다.

외향인 표준 사회의 진짜 쓴맛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손 번쩍 들고 발표하는 학생은 모범생이요, 우물쭈물 시간 끄는 학생은 웃음거리가 되는 곳이다. 5~6명이 한 조가 되어 조별 활동을 하는 시간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조원 평가에서 처참한 점수를 받게 된다. 사교성이 좋지 않아 걱정된다는 알림장 속 선생님의 한 줄 평은 덤이다.


그렇게 자란 어른은 다시 아이들에게 외향인 표준을 주입한다. 외향인 어른은 그런 가르침이 자연스럽다. 내향인 어른의 마음은 어떨까. 정말 아이가 내향적인 성격을 뜯어고치길 바라서일까? 그 가르침은 어쩌면 '답답하고 나잇값 못하고 유난 떠는' 내향인으로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내향인 선배의 가슴 시린 조언이 아닐까.


외향인 표준에 맞게 행동하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편하다. 나도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내 몰려오는 자괴감은 온갖 쓰레기를 몰고 날아드는 소용돌이처럼 내향인의 마음을 어지럽게 뒤흔든다. 그 소용돌이의 핵은 내향인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다.


오늘도 사회의 요구에 맞게 외향인 가면을 쓰고 집 밖을 나선다. 어쨌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고 침대에 쓰러져 생각한다. 나는 왜 타고난 기질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외향인은 평생 하지도 않을 고민을 왜 내향인이라는 이유로 속으로 되뇌며 좌절해야 하는 걸까.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대혼란인 내향인을 이모티콘으로 묘사한 책의 표지가 재밌다.



김상민 작가의 에세이 <낯가림의 재능>은 9년 차 마케터이자 팀장이 겪은, 그리고 여전히 겪고 있는 내향인으로서의 삶을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다. 내향인에게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설마, 저렇게까지 한다고?' 하는 일상으로 에세이는 시작된다. 이후 작가의 어린 시절 방황과 본인을 내향인으로 정의 내리게 된 계기, 내향인의 강점을 살려 마케터가 되고 팀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포인트는 내향인으로서 겪는 어려움과 지혜로운 극복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냉정하게 봐야 한다. 결국 해야 하는 건 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끝까지 우리를 배려해 주지 않는다. 한두 번 호의를 베풀 수는 있으나 결국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극복해야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내가 나를 알리고, 준비해 온 생각과 이야기를 펼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야 뭐라도 바뀐다. 아무도 그걸 대신해주지 않는다.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는 자기 살길 찾기에도 빠듯한 곳이다. - 48p


내향인들이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냉정한 현실이다. 사회에서는 절대 '내향인이라서...'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작가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결과가 훌륭하면 그 과정에서 긴장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극복해야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에서 작가가 터득한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도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삶을 되감아보면 우리는 모두 거대한 테두리 속에서 성장하고 자라왔다. 그리고 그 테두리의 많은 부분은 외향인을 기준 삼아 그어져 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제시되는 모범 답안의 테두리는 명백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100명의 아이가 하나의 정답 대신 각자 품는 100개의 답을 좇길 바란다. 말수 적고 조용한 아이도, 바깥세상보다 활자 세계에 더 심취한 아이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 74p


비단 어린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바깥세상보다 활자 세계에 심취한 어른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다. 100명의 어른이 하나의 정답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100개의 답에 모두 동그라미 쳐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 명의 지독한 내향인으로서 <낯가림의 재능>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향인이기에 속으로만 하는 생각을 세상에 펼쳐 보이기 어려웠을 것을 안다. '이게 맞나?' 수십 수백 번 의심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을 닳도록 다듬었을 것도 너무 잘 안다. 작가의 글에는 '물론'과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다. '물론'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다른 의견도 얼마든지 수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이며,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그럼에도 내 의견을 꿋꿋하게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이다.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내향인의 생각을 응원한다. 


<낯가림의 재능> 속 이야기는 내게 전혀 특별할 것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했다. 나 역시 여느 내향인처럼 스스로를 유별난 사람으로 정의하며 살아왔다. 겉돌고 피하고 도망치며 여기까지 왔다. 어른이 되며 자연스럽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됐고, MBTI의 선풍적인 인기를 통해 내가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했다. <낯가림의 재능>은 유별난 행동의 이유를 설명(또는 변명)해주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며 안심시켜준다. 때로는 적절한 해결책도 제시한다. 책의 제목부터 '낯가림의 재능'이다. 낯가림 때문에 일평생 스트레스받으며 살아왔는데 이게 재능이 될 수 있다니!


낯선 얼굴 앞에서 호기심보다 두려움을 먼저 떠올리는 천성 반대편에는 경험으로 축적된 신중함이 자리해 있다.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말주변은 자연스레 단어와 문장을 빚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밤마다 쏟아지는 생각의 괴로움은 더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사람과 세상을 향한 낯가림은 우리를 힘겹게 하는 빌런이자 끝내 자기다움을 완성시키는 조력자다. 낯가림의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는 분명 그들만이 구축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 - 8p


내향인에 의한, 내향인을 위한 조용한 외침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런 사람이 사실은 세상의 절반이나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