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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Apr 10. 2024

나는 왜 나를 모를까

맨몸과 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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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의 시간(https://brunch.co.kr/@h367-1552/73)


나는 멈춰버린 시간 속을 통과하고 있다.

때로는 모든 게 너무나 그대로여서 이대로 박제되어 버릴 것 같다.

아주 조금씩 흐르는 시간. 공간의 금 사이로 새어 나와 희미하게 나를 어루만지는 시간.


몇 시간째 체중을 견디고 있는 엉덩이가 멍든 사과처럼 짓무를 것 같다.

바늘로 목구멍을 긁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몇 초간 마른기침을 한다.

비행기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인천에서 상해, 상해에서 출발해 다시 10시간.

끝날 것 같지 않던 비행이 끝났다.

홀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결국 혼자 오고 말았구나.

여권 문제로 이리저리 방법을 알아보던 친구는 아무래도 힘들겠다며 여정을 취소했다.

동시에 열흘 간의 나홀로 여행이 시작됐다.


-


우여곡절 끝에 첫 숙소에 도착했다.

휴대폰으로 생존신고를 하고는 침대에 퍼져있다가 생각했다.


"나 이제 뭐하지?"


나는 지금까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막상 혼자서 여행하려고 보니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는 나는 어디로 갔을까.

장강명 작가는 에세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사는 건 객관식 시험을 치르는 것과 비슷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옳은' 보기를 골라야 하니까.

삼십 넘게 선택지를 들여다봤지만 '너는 누구냐'는 물음 앞에 서니 연필을 들기가 어렵다.

나를 이해하는 게 왜 이리 요원한 걸까.

헤매는 건 이쯤 하면 됐다고, 이제 다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도시도, 인생도 미로 같다

여독에 찌든 몸이 얼른 개운해지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씻고 누워야지.

튀르키예에 오기 전 유튜브에서 '하맘(Hamam)'이라는 튀르키예식 목욕탕을 봤던 게 기억났다.


카운터에서 결제를 하고는 찜질방 스타일 한증막에 들어가 몸을 달궜다. 다음 코스는 유리 타일로 덮인 방인데 한쪽에서 따뜻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개 같은 수증기 속에 앉아있으니 촉촉한 찐만두가 된 것 같았다.

세신사가 흐물거리는 나를 넓은 욕실로 안내했다. 한쪽에 자리한 수도꼭지에서는 뜨끈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가운데에는 신전의 제단처럼 거대한 대리석 침상이 있는 곳.

수건을 두른 그녀는 짧은 영어로 아픈 곳이나 수술한 곳이 있냐고 묻더니 대리석 침대 위에 누우라고 다. 뜨끈한 물을 연거푸 끼얹더니, 엄청나게 향기로운 비누로 거품을 내 길다란 천으로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줬다. 전문적인 세신이라기보다는 초보 엄마가 아이를 씻기는 목욕에 가까워서 그녀가 머리를 감겨주는동안 코로 물을 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소 우악스러운 손길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온기에 마음이 풀렸고, 개운하게 씻고 나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타인이 목욕을 시켜준 건 꽤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가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선 바나나우유를 얻어먹었던 기억도 났다. 뽀송하게 몸을 닦자 번잡하던 마음까지 한결 가벼워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아무도 날 모른다. 나도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깨끗하게 비워진 빈칸이다.

맨몸으로 낯선 공백 위에 서 있다.

무엇을 얻게 될까.

서럽고 설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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